재야논객열전
광해군 보다 못한 문재인의 외교,
 장자방 2019-08-06 09:24:50  |   조회: 56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9년간이나 더 집권하다가 죽자 그 뒤를 선조로부터 부단한 핍박과 견제를 받았던 영민한 세자 광해군이 물려받았다. 그때가 서기 1608년이었다. 광해군은 세자의 신분으로 임진왜란을 직접 겪으면서 국력의 열세를 절감했고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하러 온 명나라의 간교와 횡포를 목도하면서 외교의 중요성을 터득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임금으로 즉위하자 현실주의자를 대거 기용했다,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선정의 기반을 구축하고 전쟁 중에 피폐된 산업을 복구하고, 부강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토지 조사 사업과 호적 조사 사업을 실시하였으며, 공납제를 대동법(大同法)으로 바꾸었고 무너진 성벽과 무기를 수리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외교노선도 친명사대(親明事大)를 추구하던 이전과는 다른 정책을 채택했다, 광해군이 선택한 외교노선은 실리에 중점을 둔 중립외교였다.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병을 보냈던 명나라의 국력이 현저히 쇄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었고,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 사회에서는 급속한 통일운동이 일어나 세력을 급격하게 키워 나가는 등, 북방 주변의 정세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세력을 키워오던 여진족이 후금(後金)을 건국하여 스스로 왕이 지배하는 나라임을 과시하며 서쪽으로 세력을 뻗치다가 급기야 1618년 명나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것을 보면 광해군의 외교적 안목이 탁월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명나라는 후금이 공격해 오자 조선에 대해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임진왜란 때 지원을 받았던 적이 있는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청을 거부하지 못해 13천 명의 지원병을 보냈다. 하지만 조선군 도원수 강홍립에게는 별도의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그것은 정세를 파악하여 상황에 맞춰 행동하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도원수 강홍립은 광해군의 지시를 빈틈없이 실행에 옮겼다, 전장에 도달한 도원수 강홍립은 우선 후금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후금과 휴전부터 맺었다. 반면, 명나라 모문룡 부대가 압록강 입구에 있는 가도(假島)에 주둔한 것을 계기로 조선군은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며 명나라의 환심을 샀다.

 

이처럼 조선은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내치와 국방에 주력할 수 있도록 실리를 챙겼으니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빛을 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내부의 사정은 간단치가 않았다. 실권을 잃은 서인세력은 광해군의 중립 실리외교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정책으로 간주하고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광해군은 절대적인 왕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 16234, 드디어 서인세력이 능양군을 앞세워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광해군은 임금의 자리에서 폐위되었고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

 

강화도 유배 중에 부인과 아들 부부가 모두 목숨을 잃었는데도 인조는 광해군을 강화도에서 다시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 사약을 내렸다. 이것이 18년 유배생활의 마지막이었고 그의 나이 향년 67세였다,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적 감각을 지닌 임금이었지만 반정으로 인해 졸지에 폐륜 군주로 매도된 탓에 조선이 망할 때까지 광해군은 사후(死後) 시효조차도 받지 못했다. 한편 북방의 후금은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국호를 후금에서 청()나라로 바꾸고 기세등등하게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고 명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려 있었을 정도로 북방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광해군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인조 정권은 급변하는 북방의 정세와 명나라의 현실을 망각한 채 의리와 명분을 들어 광해군의 중립외교 노선에서 벗어나 친명배청(親明背淸) 외교 노선을 펼쳐 청나라의 반발을 크게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청나라는 친명노선을 고집하는 인조의 외교노선에 격분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친명정책을 고집하는 조선을 배후에 두어선 안 되겠다고 결심하여 일으킨 전쟁이 1623(인조 13)에 발발한 병자호란이다, 청나라 숭덕제는 이 전쟁에 병력 12만 명을 동원했고 인조와 조정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수성전(守成戰)을 벌였으나 남은 것은 삼전도의 굴욕과 10개항으로 구성된 항복문서였다, 그 항복문서 제 1항이 조선은 청나라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행한다는 것이었으니 독립국 조선이 졸지에 제후국 신세로 추락하고 말았다.

 

삼전도의 굴욕은 국력이 약한 나라가 외부 국제 정세에는 까막눈이 되어 스스로 쇄국의 틀 안에 박혀 대의명분론만 주장하다가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외교 참사요 굴욕적인 역사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국가의 외교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산업화가 절실했던 1965, 한 단계 멀리 내다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맺은 한,일 기본협정으로 일본과 수교를 맺은 이래 큰 무리 없이 5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좌파세력에게 있어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쓰라린 역사는 잊을만하면 되살아나는 생물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과거만 기억하고 책망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했다, 비록 좌파정권이기는 했지만 김대중 정권은 미래를 내다보는 외교를 택하여 친일 노선을 견지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이 일본 정부와 맺은 위안부 화해치유재단 설립도 따지고 보면 미래로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선 실리적 외교만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것을 간파한 선의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과거 정부의 외교정책을 전면 부정했으니 일본이 경제보복에 나서도록 도화선에 불을 지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이럴 때 일수록 가장 필요한 것이 외교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외교 보다는 대결을 선택하고 있다. 뜬금없이 생소하게 평화경제라는 말을 들고 나와 남북경협으로 평화경제를 하면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했다. 도대체 하루가 급한 이 엄중한 시기에 언제 될 지도 모를, 그것도 북한에 무슨 기술력, 자원, 시장이 있다고 도깨비 같은 발언이 나오는지 갈수록 태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19-08-06 09:2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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