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가 만난 사람] 피아니스트 백건우

영화감독·사진작가가 꿈이었으나 피아니스트로 숙명 같은 삶
'은막의 스타' 아내 윤정희와 행복...알츠하이머 심해질까 걱정
北 납치미수사건 아직도 트라우마...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일
젊은 날엔 어려운 곡 소화...나이 들면서 마음의 자유 찾은 듯

'건반 위의 구도자'라 불리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건반 위의 구도자'라 불리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연주 일정으로 국내 체류 중인 피아니스트 백건우(76)와 자리를 함께했다. 몇 달만에 만난 건장한 체구의 백건우는 필자를 안아주며 따뜻하고 반가운 인사를 해왔다. 그는 언제 만나도 조용한 목소리, 품격 있는 언행, 그리고 평화로운 온기를 느끼게 하는 사람. 변함이 없다.

그의 이번 귀국 연주회는 슈만 신보 이후 2년 만에 발표한 ‘그라나도스-고예스카스’ 발매 기념 레퍼토리로 짜여졌다. 스페인 작곡가 그라나도스의 곡은 스페인 민족음악의 낭만적이고 따뜻한 선율과 함께 세련되고 다채롭고 열정적이고 인간적인 매력을 안겨준다고 소개했다.

인터뷰를 하기 전날 조선일보에 ‘피아니스트 백건우, 사진작가로 데뷔한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건반 위의 구도자’인 피아니스트에게 난데없는 사진작가 데뷔 기사라니…. 백건우·윤정희 부부와 40년 넘도록 가깝게 인연을 이어온 필자도 궁금해 그것부터 물었다.

-사진작가 데뷔라니 깜짝 놀랐어요.

"데뷔란 말은 좀 부담스럽네요. 사진찍기와 영화 감상은 평생 틈틈이 즐겨온 나의 취미입니다. 이번 음반 표지와 속지 사진을 내가 찍었습니다.영화 보기와 사진 찍기는 줄리아드 음악학교 시절인 15살 무렵부터 비롯됩니다. 앵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작품이 될 수도 있고 기념사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어요."

-대만에서 사진전도 준비 중이라는데.

"오는 11월 대만 연주 일정이 잡혀 있는데 그때 사진전도 준비 중입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되면 파리에서도 전시회를 추진하려고 해요. 하지만 작가 활동으로 보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사진작가들이 함부로 행세한다고 건방지다 할 겁니다."

-이번에 스페인 작곡가인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고예스카스 연주를 한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40여 년 전 뉴욕에 머물던 젊은 시절, 알리시야 데 라로차가 연주하는 고예스카스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시 젊은 학생이었는데, 그 곡을 들으며 음악이 정말 있구나를 체험했어요. 초가을이나 초겨울쯤이어서 날이 추웠는데 음악을 듣는 동안 카네기홀에 마치 햇빛이 내리쬐듯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음악을 통해 다른 세상을 다녀올 수 있구나, 피부로 느꼈던 순간이었죠."-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그의 아내 영화배우 윤정희. /인터뷰365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그의 아내 영화배우 윤정희. /인터뷰365

평생 화제가 되는 영화는 모두 보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지요.

"내 꿈은 첫 번째가 영화감독이었어요. 두 번째가 사진작가였고요. 피아니스트는 희망순위 세 번째였는데, 내가 내 인생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숙명 같은 거로 봐야지요. 다시 산다면 필경 영화감독을 할 겁니다."

-영화를 좋아해서 배우와 결혼까지 하게 된 것 같군요.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인 윤정희 여사 증세는 지금(9월 말 현재) 어떤지요?

"현재의 의학으로는 회복을 기대할 수 없어서 더 심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족과 간병인, 도우미들이 매달려 뒷바라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원에 가면 야단을 치고 큰소리로 소란도 피웠는데, 이제 그런 기력도 없어요. 의사와 치료시설이 있는 전문 병원으로 옮겨야 할지 걱정하고 있어요."

-윤정희 여사는 60-7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의 히로인입니다. 천재 피아니스트를 남편으로 만난 순간부터 또 한 편의 드라마 주인공이 됐습니다.

"내 인생에서도 진희 엄마를 만난 그 시기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즐거움에 취해 살았습니다. 환상적인 행복이었지요. 그러고보니 우리 부부는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사건도 겪었습니다."

-1977년 발생한 북한 납치미수 사건이군요. 친북 동포 화가의 초청으로 스위스로 갔다가 유고슬라비아 공항에서 유괴되는 도중 극적으로 탈출했습니다. 신문들이 연일 대서특필해 나라 안이 떠들썩했습니다.

"그때 진희 엄마는 임신 6개월째였어요. 24시간 동안 악몽이었습니다. 지금도 트라우마가 남아 있을 정도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자다가도 간혹 그 순간이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요. 어느 해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 진희가 귀가를 안 해요. 우리 부부는 졸도라도 할 만큼 공포에 떨었어요. 유괴라고 생각해 경찰로 달려갈 참에 마을 입구에서 발견했어요. 경비원과 함께 잠시 놀고 있는 거였지요."

-세계 연주 여행길을 동반하던 아내가 병상에 있는 것이 가장 큰 고통처럼 보입니다. 앞으로 남은 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매일 생각하지요. 자유롭고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조용히 연주만 하며 살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 힘들고 혼란스러워요. 진실이 가려지고 무너지는 문제들이 안 생겼으면 좋겠어요."

백건우는 이번 귀국 연주회에서 스페인 작곡가 그라나도스 곡을 연주했다. /빈체로
백건우는 이번 귀국 연주회에서 스페인 작곡가 그라나도스 곡을 연주했다. /빈체로

-한동안 처가 가족과 소송문제로 마음고생도 많았던 것 같은데 이제 해소 됐는지요?

"아직 진행 중입니다. 서울남부검찰청이 재수사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해 경찰에 재수사 요청을 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윤정희 여사에게 건강에 따른 기적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알츠하이머 환자를 간호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곁에서 지켜본 사람만이 그 가족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진희 엄마는 연기 활동을 그만둔 지 오래지만 언제나 주인공, 주연배우, 스타의 환상을 버리지 않고 살았어요. 솔직히 남편으로 힘들 때도 많았어요. 파리에서는 무명의 한국인이지만 귀국하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여배우 모습이었죠."

-팔순을 눈앞에 두기까지 세계 여러 도시에서 연주를 해오셨습니다. 마음에 남아 있는 행복하고 짜릿한 공연 추억도 많겠지요?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는 무대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곡 전곡을 이틀 동안 연주한 겁니다. 러시아 음악계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공연 극장 사상 처음이라는 극찬이 쏟아져 나왔어요. 보통 5명이 나누어 연주하는 곡을 혼자서 해낸 건데, 거대한 공연장인데도 좌석이 모자라 복도까지 의자를 채워 객석을 만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오랫동안 피아노 연주를 하려면 체력도 좋아야겠습니다. 건강은 어떻게 유지합니까?

"피아니스트는 연주 동작이 모두 운동입니다. 마음은 연주곡에 집중해 잡념이 끼어들 자리가 없고 몸은 손가락에서 팔, 발가락끝에서 머리끝까지 리듬에 맞춰 저절로 전신운동을 합니다. 피아노에서 그런 건강 에너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도시의 골목길을 걷는 취미가 있어요."

-매일 피아노 연습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늘 새로운 곡에 도전해왔습니다.

백건우와 인터뷰를 겸한 식사자리. /인터뷰365

"경력을 쌓기 위해선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많아요.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음악도 소화해야 하고, 때론 짧은 시간에 새로운 곡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요. 여유가 생겼죠. 이제는 하고 싶은 곡을 할 수 있는 스케줄에 맞춰서 하고 있습니다."

백건우는 이제는 "음악을 즐기고 싶다"고 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자유를 찾은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음악과 더 친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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