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공사(公私)를 구분하라는 말이 있다. 일본에서는 공사를 혼동하지 말라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같은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근본적 사고방식이 다르다. 일본에서는 공과 사가 원래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혼동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며, 한국에서는 원래 경계가 애매하기 때문에 확실히 구분하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일본에서 ‘공(公)’은 시간, 공간에 따른 사회적 역할과 같은 개념이다. ‘공’적인 자리에 ‘사’적인 것을 들고 오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예를 들어 업무시간에 개인적인 전화를 받지 않는다. 개인 핸드폰은 사물함에 넣고 일하는 경우가 많다. 자녀 어린이집이나 학교 담임 선생님의 개인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공적인 자리에 있는 시간에 사적인 급한 연락을 받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회사 전화 등 공적인 채널을 통해 받을 수 있다. 그 정도가 아닌 연락은 기본적으로 공적인 시간에 주고받지 않는다. 반대로 업무상 핸드폰을 써야 하면 업무용 핸드폰이 지급된다. 이 업무용 핸드폰을 개인용으로 사용하면 개인 사용분 요금을 내는 경우도 있다.

너무 철저하게 공사가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적 역할’외에는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공적인 회사에서 얼마든지 ‘절친’을 사귈 수 있다. 친해진 동료들과 주말에 만나서 영화를 보거나 식사를 하는 일은 다반사며 해외여행 가는 일도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사적인 친구가 된 동료와 친구로서 일을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친구’라는 이유로 무리하게 요구를 하거나 들어주는 일은 일절 없다. 업무는 공적인 것이기 때문에 ‘친구이기 때문에’ 유리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일본 사회의 이런 관계성이 불편하고 융통성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공적인 곳에서는 명확한 기준이 있으며, 그 기준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뿐이다. 즉, 특정인에게만 유리한 것도 없고, 반대로 불리한 것도 없다. ‘이번에만 좀 봐주세요’라며 기한이 지난 신청은 받아주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청기한이 지났기 때문’이다. 이를 융통성 없다고 하는 것은, ‘나를 특별대우 해주지 않아서 억울하다’는 말 아닌가?

생각해보면, 우리는 ‘특별대우 받는 1인’이기보다 그 외 대다수에 속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다면 융통성이 없더라도 ‘특별대우를 받는 사람’이 없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공’은 곧 사회다. 일본은 공적 부분에 많은 규칙을 둔 사회다. 사람을 잡기 위한 규칙이 아니다. 이것이 지켜지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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