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총리집무실인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TV리포터들이 이날 발간된 영국 일간 '더 선'(The Sun)을 들고 있다. 신문 1면에는 리즈 트러스 총리 사진과 함께 '유령 총리'(The Ghost PM)라는 표현이 있다. 트러스 총리는 지난달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뒤를 이어 취임했으나, 허술한 감세정책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하며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다. /AFP=연합
1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총리집무실인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TV리포터들이 이날 발간된 영국 일간 '더 선'(The Sun)을 들고 있다. 신문 1면에는 리즈 트러스 총리 사진과 함께 '유령 총리'(The Ghost PM)라는 표현이 있다. 트러스 총리는 지난달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뒤를 이어 취임했으나, 허술한 감세정책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하며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다. /AFP=연합

대규모 감세안을 밀어붙이다 파운드화 추락 사태를 맞은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트러스 총리는 지난 17일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책임을 인정하고, 실수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비싼 에너지 비용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세금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며 "하지만 우리는 성급했고, 너무 멀리 갔다"고 덧붙였다. 선의로 추진한 일이지만 접근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고백인 셈이다.

지난달 6일 취임 일성으로 "폭풍우를 헤치고 경제를 재건하겠다"며 야심차게 추진했던 정책들이 잇따라 폐기되면서 트러스 총리에 대한 사퇴 압박이 커지고 있다. 이 같은 기류는 트러스 총리가 속해 있는 보수당도 마찬가지다.

트러스 총리가 내놓은 감세안은 내년 0%로 추정되는 영국의 경제성장률을 2.5%로 끌어올리기 위한 경기부양 조치의 일환이다. 문제는 대규모 감세로 인한 재정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가 빠졌다는 점이다. 금융시장에선 이를 영국 정부가 엄청난 적자국채를 발행해 메운다고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영국의 국채금리가 폭등했다. 국채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이의 여파는 곧장 부채연계투자(LDI) 시장으로 번졌다. 연기금이 국채를 담보로 최대 7배까지 레버리지 투자를 하는 파생상품 LDI의 운용자산 평가액이 낮아지면서 추가 담보금 납부 요구인 마진콜이 쇄도한 것이다. 파산 직전에 몰린 연기금은 담보금 추가 납입을 위해 또 다른 국채를 매각하면서 국채가격이 더욱 떨어지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연기금의 연쇄 파산은 지난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과 글로벌 금융위기 때처럼 전 세계 금융시장의 붕괴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는 우려를 낳았다. 이에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은 지난달 28일 650억 파운드(약 103조원) 규모의 국채 매입을 발표하며 급한 불은 끈 상태다. 하지만 국채 매입은 지난 14일 종료됐다. 시장에 돈을 푸는 이번 시장 개입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있는 영란은행의 통화정책과도 상충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은 파운드화 가치 폭락을 불러왔다. 지난달 24일 달러 대비 파운드화 가치는 장중 1.0869달러까지 추락했는데, 이는 1985년 이후 37년 만의 최저 수준이다. ‘파운드화 쇼크’는 영국의 모든 자산이 매물이 됐다는 말이 나올 만큼 강달러를 앞세운 미국 사모펀드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오일머니도 가세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파운드화는 영연방에 속해 있는 상당수 국가들이 무역거래의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등 스털링 블록으로 인해 세계 4번째 기축통화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았던 파운드화도 갈팡질팡하는 정치 리더십으로 국제적 위상과 신뢰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영국은 최근 코로나19 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또 다른 위기를 맞은 상태다.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 후유증으로 경기회복이 더딘 와중에 물가마저 가파르게 뛰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7월 10.1%를 찍고 8월에 9.9%로 내려왔지만 여전히 주요 7개국(G7)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영란은행은 지난해 12월부터 잇따라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0.25%였던 기준금리는 올해 9월 2.25%로 올랐다. 게다가 영란은행은 오는 11월 기준금리를 한번에 1.0%포인트 올리는 울트라스텝을 단행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는 1989년 이후 최대 인상폭이다.

이에 주택담보대출의 5년 평균 고정금리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6%를 넘어섰다. 영국은 30년 고정금리 주택담보대출이 많고, 대부분의 주택담보대출에 2년 또는 5년 후 재설정되는 금리가 적용돼 기준금리 인상에 한층 취약하다. 경제분석기관 캐피털이코노믹스는 향후 2년 동안 영국의 주택가격이 12% 하락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금 영국이 처한 상황은 고물가와 저성장에 따른 민생고로 파업이 잇따르던 1970년대 후반 ‘불만의 겨울’과 유사하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최근 영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기존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일각에서 영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다는 위기설이 나오는 배경이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