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18) 주사파 일색이 된 전대협과 한총련

범민련·범청학련 출범...연방제 통일·주한미군 철수 등 北 주장 동조
PD진영도 문민정부 이후 신세대 문화 외면 거대 담론·혁명론 일관
非주사 NL 관악자주파 새 흐름도...박원순 등과 참여연대 결성 역할

1991년 5월, 노태우 정부에서 국무총리서리에 임명된 정원식 전 문교부장관은 취임 전 마지막 강의를 위해 서울 외국어대학교에 나갔다가 운동권학생들로부터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

제 정파 협의체에서 주사파 일색화로

91년 강경대 폭행 치사 사건에 이은 분신정국, 그리고 정원식 총리 밀가루 테러 사건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3당 합당으로 좌절감에 빠진 극단적인 재야, 학생운동의 ‘단발마’와 같은 비명이었다.

하지만, 그 비명에 대한 화답은 참혹했다. 김지하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고 일갈했고, 강기훈에 의한 ‘유서대필’이라는 가짜뉴스로 국민들은 냉담해졌고, 곧이어 치러진 지방선거는 야권의 참패로 끝이 났다. 극단적 투쟁이 극단적 패배를 부른 것이다.

그렇게 90년대 들어와 재야, 학생운동권은 좌절감에서 시작했다. 재야와 사회운동은 ‘부문운동’과 ‘연합전선운동’, 그리고 분야별 시민운동으로 분화되었다. 전노협과 사무직 노동조합 연합체인 업종회의가 결성되고,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전빈협(전국도시빈민협의회),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청협(전국청년단체협의회) 등이 속속 결성되었다.

그리고 분야별로 시민운동이 태동 되었다. ‘환경련(환경운동연합)’이 결성되고,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여연(여성운동연합)’, ‘민교협(민주화운동교수협의회)’, ‘민변(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예총(민족예술인총연합)’, ‘민동(전국대학민주동문회)’, ‘민가협(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 등이 속속 만들어졌다.

이들의 연합전선체로 91년 12월에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 탄생했다. 전국연합은 민통련, 전민련에 이어 재야와 민주화운동 세력의 연합체로 만들어졌고, 학생운동은 연합전선체인 전국연합을 떠받치는 핵심역할을 했다. 즉, 전대협(한총련) - 전국연합이 중심축을 형성하며, 전체 운동을 이끌고 나간 것이다.

또, 학생운동이 주력한 것은 통일운동이었다. 88년부터 학생운동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슬로건으로 남북학생 판문점회담을 추진했다. 89년에는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평축)에 전대협의 대표로 임수경을 파견했다. 그 이후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과 범청학련(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그리고 8.15 범민족대회는 학생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범민련, 범청학련의 결성

남과 북, 해외가 함께 통일운동을 벌이자는 범민련 결성은 90년 8월 15일 1차 범민족대회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제1차 범민족대회 공동결의문을 통해 "남에 있는 북에 있든 관계없이 진정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동포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대단결을 실현할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결성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어 베를린에서 진행된 남, 북, 해외 대표 간의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 통일기구 결성 3자 실무회담’에서 조직체계, 당면사업, 결성사업 계획 등을 확정하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결성하였다. 또 회담에서는 91년 1월 말까지 남, 북, 해외의 지역본부를 결성한 후 의장단 회의를 소집하여 강령과 규약을 확정하는 등 범민련 결성사업을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1992년 범청학련 결성식.
1992년 범청학련 결성식.

90년 12월 16일에는 윤이상(재독 작곡가)을 의장으로 한 해외본부가, 91년 1월 23일에는 문익환 목사를 준비위원장으로 한 남측본부 준비위원회가, 91년 1월 25일에는 윤기복을 의장으로 하는 북측본부가 결성되었다. 해외본부는 미주, 일본, 중국, 독립국가연합(구 소련), 호주, 유럽, 캐나다 등에 지역본부를 두었고, 범민련 공동사무국(베를린, 이후 일본)을 운영했다.

범민련은 가장 핵심적인 활동으로 매년 8월에 추진되는 ‘범민족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 화해 협력을 위하여 토론회, 집회 등을 열었다. 90년 1회 대회를 기점으로 매년 8월 15일에 ‘범민족대회’를 개최하였지만, 정부의 탄압으로 이적단체가 된 ‘범민련’은 최고 의결기구인 ‘범민족회의’를 진행하지는 못했다.

범민련과 함께 전대협과 한총련 등 학생운동의 결집체가 ‘범청학련’이었다. ‘범청학련’은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청년조직이 연합해 1992년 8월 15일에 결성되었다. 쉽게 이야기해서 ‘범청학련’은 ‘범민련’의 청년학생 조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따라서 ‘범민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듯이 ‘범청학련’도 이적단체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조직은 중앙조직과 공동사무국, 지역조직으로 구성됐으며, 중앙조직으로는 총회와 중앙위원회, 공동의장단으로 구성되었다. 지역조직은 범청학련 남측본부와 북측본부, 해외본부 등 3개로 구성되었으며, 해외본부 산하에는 일본지부 중국지부 러시아지부 미국지부 유럽지부 등을 두었다.

공동사무국은 독일의 베를린에 설치해서 해외본부가 운영을 맡도록 했다. 공동의장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약칭 한총련) 의장, 북한 조선학생위원회 위원장, 해외동포 청년 학생대표 등 3명이 맡았다. 범민련과 범청학련에 대해 대법원은 97년 연방제 통일,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 등 북한 정권에 동조하는 주장을 폈다는 것을 근거로 이적단체로 판결했다.

주사파로 일색화 되어간 전대협과 한총련

통일운동에 매진한 전대협은 점차 NL노선과 주체사상파로 일색화 되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통일운동은 NL계열, 특히 주사파 조직에서 관심이 클 수밖에 없고, 남과 북 해외의 3자 연대에 의한 범민련과 범청학련과 합의로 활동할 때, 북한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전대협 초창기만 하더라도, 심지어 4기 전대협만 하더라도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의장은 PD계열이 차지할 정로도 전대협은 NL과 PD의 동거체제였다. 비율은 NL진영이 우세하고, ‘언더 지도부’는 주사파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지만, 겉으로는 NL과 PD 등 제정파가 연합하는 형태를 띠었다.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에 PD와 비운동권 총학생회도 다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정치투쟁과 ‘범민족대회’ 등 통일운동에 집중하면서 비운동권 총학생회는 물론, 통일운동에 관심이 적은 PD진영도 전대협, 한총련과 거리를 두었다. 따라서 전대협 후반기에서 한총련으로 전환하는 92년~93년에 전대협과 한총련의 지도부는 물론, 직업적 운동가로 구성된 정책실 등 ‘언더 지도부’는 주체사상파로 일색화될 수밖에 없었다.

91년 극단적인 투쟁을 전개했던 재야 학생운동의 상황은 92년이 되어도 나아질 것이 없었다. 노동자, 농민 등 부문운동과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운동이 발전하고는 있었지만, 운동의 중심축인 재야와 학생운동은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결국, 92년 대선에서 야당인 김대중 후보는 압도적인 차이로 김영삼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93년 들어와서 학생운동은 제6기 전대협의 시대를 마감하고, 연합체로의 발전을 모색했다. 그것이 93년에 창립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다. 한총련의 창립 시에는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 한총련’이라는 슬로건이 내세웠듯이 어느 정도는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이었다. 이미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넘어오면서 PD계열이나 비운동권 총학생회의 참여는 배제되다시피 했다. 학생 대중과 함께한다는 대중노선도 구호에 그쳤다. 한총련의 언더 지도부는 대학을 졸업하거나 휴학한 채,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전업적 운동가들로 일색화 되었다.

김영삼 정부 들어와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경제적 풍요를 누린, 서태지로 대변되는 신세대 문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지만, 한총련 등 학생운동은 ‘불패의 애국 대오 한총련’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며 북한식 혁명주의 노선으로 일관했다. NL과 주사파로 일색화된 학생운동이 어떻게 경직화되어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1993년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한총련 출범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93년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한총련 출범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물론 한총련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PD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즉, 사회는 문민정부가 출범한 상태에서 현실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했고, 젊은 층은 풍요로운 성장환경에서 배낭여행 등 신세대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학생운동권은 거대 담론과 혁명론, 그리고 상명하달에 의한 동원식 거리투쟁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NL진영의 한총련과 PD진영 외에 새로운 학생운동이 흐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관악자주파로 거론된 비주사 NL진영이다. 이들은 평범한 대학생들의 일상에 주목하며 새로운 학생운동 방식을 시도했다. 이들이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었고, ‘관악자주파’ 계열은 박원순 등과 함께 ‘참여민주사회연대(참여연대)’를 만드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한총련은 전대협의 대중동원 능력을 넘어섰다. 전대협 출범식 때는 3~4만 정도의 인원이 모였지만, 한총련 출범식 때는 5만~8만에 달하는 인원이 동원되었다. 학생운동이 서울 명문대 엘리트 중심에서, 지방대 등이 중심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논쟁과 이론투쟁보다는 선전과 선동을 담당하는 ‘대학신문’이나 ‘문화패’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한총련이 첫선을 보인 것은 93년 5월 29일 고려대였다. 이전에 전북대에서 대의원대회를 열어 제1기 의장으로 김재용(한양대 정외4)을 선출했으며, 조국통일위원장에는 김병삼(연대 공대4)를 선출하였다. 한총련 출범식이 열리는 고대 운동장에는 8만여 명이 운집하였고, 지역 총련별로 깃발과 유니폼까지 차려입어 장관을 연출했다.

고려대 학생회관에서는 북한 및 해외 학생대표들과 국제전화로 교신하였다. 한총련에서는 김재용을 비롯해 11명, 북한 조선학생위원회에서는 허창조 등 6명이 북경의 연경호텔에서, 김창오 등 해외본부 의장단 6명은 일본 동경에서 국제전화로 2시간 동안 회의를 열고, 공개적으로 통일방안과 ‘3차 청년학생축전’ 개최를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서 북한으로 귀환한 미전향장기수 리인모는 ‘범민련’ 해외본부 임민식 사무총장의 대독한 연대사를 통해 "나는 북한에서 잘 지내고 있다"며, "우리 모두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남과 북, 해외의 공동의장단은 ‘한반도 평화정착’, ‘8.15범민족회담 성사’, ‘남북청년학생 자매결연 예비회담 개최와 범청학련 연대강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공동결의문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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