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이승만 시대(13) 日王에게 '정부 수립' 서한 통고..필라델피아서 첫 한인의회 개최
[연재]이승만 시대(13) 日王에게 '정부 수립' 서한 통고..필라델피아서 첫 한인의회 개최
  • 이주영(李柱郢)교수
  • 승인 2020.0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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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주영(李柱郢): 
건국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공동대표.
1942 평북 용천 출생. 인천중-제물포고 졸업
서울대-서강대-하와이대 사학과 수학
프린스턴대-콜럼비아대 사학과에서 연구
역사학회-한국 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건국대 사학과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주요저서: 미국의 좌파와 우파/ 미국사/ 미국현대사의 흐름/ 빼앗긴 서양문명의 역사/ 빼앗긴 우리역사 되찾기/ 한국현대사 이해/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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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호응,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를 열다

이처럼 답답했던 상황에서 3월 10일 국내로부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큰 자극을 받아 3 · 1운동이 일어났다는 기쁜 소식이 들어 왔다.  3 · 1운동에서는 의료선교사 알프레드 사록스를 통해 이승만과 비밀리에 연락을 하고 있던 개신교 세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7명이 개신교도였다.

이와 같은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예정되었던 한인대회가 1919년 4월 14일부터 사흘 동안 150여명의 미국 내 한인들과 미국인들이 모인가운데 필라델피아 중심부의 ‘소극장’에서 열렸다. 미국판 3·1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 각지로부터 한국인들이 모여 들었는 데, 그 가운데는 정한경, 윤병구, 민찬호, 임병직, 장기영, 유일한, 조병옥, 노디 킴이 있었다. 의장은 서재필이었고, 진행은 이승만과 정한경이 맡았다. 회의가 열리고 있는 도중에 이승만이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반(대통령이 없는 국무총리)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에 따라 회의는 단순한 독립선언을 넘어 독립 후의 건국 구상을 논의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그 때문에 대회는 미국이 독립할 당시 건국을 논의한 제1차 대륙회의를 모방하여 ‘제1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로 명칭이 바뀌었다. 

제1차한인회의는 ‘한국민의 목표와 열망’이란 결의문을 채택함으로써 독립 후에 건설될 국가의 모습을 밝혔다. 그것은 헌법의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서, 미국의 정체를 모방해 대통령중심제 정부와 자유민주 체제를 내세웠다. 제1차한인회의의 개회식에서는 미주리 주 출신 상원의원 셸던 스펜서가 축사를 했다. 네브라스카 주 출신의 유명한 진보파 상원의원 조지 노리스도 참석해 격려 연설을 해주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각 지회에 공문을 보내 4월 15일 저녁에 대한공화국 임시정부의 조직을 축하하는 ‘독립경축행사’를 거행하도록 했다. 이승만의 활동 근거지인 하와이의 호놀루루에서는 1,200명이 모여 대대적인 독립 축하 행사를 벌였다.

4월 16일에 제1차한인회의가 끝나자, 한국인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손에 들고 필라델피아 중심가의 미국독립기념관을 향해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간행진에는 토마스 스미스 필라델피아 시장도 참여했다. 그의 협조로 군악대가 선두에서 행렬을 이끌었다. 

미국독립기념관에 도착한 이승만은 3 · 1운동 당시 서울에서 발표되었던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대한공화국 만세 !” “미국 만세 !”를 불렀다. 이승만은 독립기념관의 협조를 얻어 조지 워싱턴이 사용했던 의자에 앉아 기념촬영을 했다. 이승만에게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으로서 대통령 취임식이 된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승만은 나중에 1920년 12월에 상해에 부임했을 때 대통령취임식을 갖지 않았다.

상해 통합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3 · 1운동 직후 한반도 안팎에서는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나타났다. 이승만은 모든 임시정부에서 주요 지도자로 추대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최고 수준의 학력과 오랜 경력의 교육자 생활 때문이었다.

1919년 3월 21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노령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그것은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에 이어 이승만을 국무경(국무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추대했다. 뒤이어 4월 11일에 선포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이 대통령과 부통령이 없는 국무총리로 지명되어 사실상의 정부 수반이 되었다.

그리고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漢城) 임시정부는 최고의 자리인 집정관총재로 이승만을 뽑았다. 세 임시정부의 직책 가운데서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를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 왜냐하면 한성임시정부는 4월 16∼23일에 전국 각지의 대표들이 비밀리에 모여 조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정통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규갑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로 조직되고, 그 배후에는 그를 아들처럼 아끼던 이상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것에 근거해 이승만은 1919년 6월부터 대한공화국의 대통령(President, Republic of Korea)으로 워싱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국가 원수들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에게 한국인의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리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8월 15일에는 3·1운동을 주제로 한 책자인  <대한독립혈전기>를 발간해 해외 교포들에게 배포했다. 그 책자에는 ‘대한민주국 대통령’인 이승만의 사진과 함께 일종의 교서인 ‘대통령 선언서’도 실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대한공화국 공사관을 설치하고 그 곳에 임시대통령으로서의 활동 본부를 두었다. 그리고는 1919년 10월부터 1920년 6월 말까지 8개월 동안 미국 각지를 돌며 대한공화국 지지를 호소하는 강연을 했다. 

그것의 영향으로 1920년 3월에는 찰스 토마스, 존 쉬로스 상원의원의 한국 독립 승인안이 아일랜드 독립승인안과 함께 미국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비록 부결되기는 했지만, 독립을 위한 공식적인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다른 한편, 상해에서는 세 개의 임시정부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통합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조직을 토대로 상해임시정부와 노령 임시정부를 합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1919년 9월에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세워지게 되었다. 

임시대통령에는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국무총리에는 이동휘가 임명되었다.  박용만은 외무총장이 되었지만, 이승만과는 일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취임을 거절했다.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에 임명되었다. 김구는 경호를 맡는 경무국장이 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각료 선정에 영향력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구미위원부를 통해 임시대통령직을 수행

이승만은 상해로 부임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안창호가 실질적인 책임을 맡고 1919년 11월에는 국무총리 이동휘가 상해에 옴으로써, 통합임시정부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 이승만은 상해와 전문을 통해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현순,안현경,장붕,조소앙 등과 같은 심복들의 편지와 전문을 통해 상해에 관한 사정을 통보받았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권으로 1919년 8월 25일에 워싱톤에 구미위원부(Korean Commission to Europe and Korea for the Republic of Korea)를 설치하여 외교 문제와 교민 문제를 처리하였다. 미국 정부와 여론을  상대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문에 임시정부의 업무는 상해와 워싱턴의 두 곳에서 분담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것을 위해 미국인 후원자들로 이루어진 한국우호연맹(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조직해 확대해 나갔다. 여기에는 서재필의 공로가 매우 컸다.  그리고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INS) 통신 기자였던 제이 제롬 윌리엄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변호사인 프레데릭 돌프(Frederic Dolph)는 구미위원부 법률고문을 맡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무실도 빌려 주었다. 그가 쓴 <한국 독립 지지 개요>는 미 국회 의사록에 수록되었다.

한편 상해에서는 임시대통령이 현지로 부임해야 한다는 압력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승만은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비서인 임병직과 함께 중국에 가기로 결정했다. 일본이 그에게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에 출발을 비밀로 했다. 행선지를 숨기기 위해 이승은 우선 하와이로 갔다.  

하와이에서 두 사람은 중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면서 미국인 친구 윌리엄 보스윅의 바닷가 별장에서 한 달 이상을 보냈다. 보스윅은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장의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하와이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는 거의 모두가 일본을 거쳤기 때문에, 두 사람은 중국으로 직접 가는 배를 찾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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