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은 한국영화의 날이다. 최초의 한국영화를 무엇으로 봐야 할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논쟁이 길었다. 결국 1919년 제작된 ‘의리적 구토’라 여기고 이 작품이 첫 상영된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기념해왔다. 올해로 103주년을 맞는 한국영화, 과연 무엇이 지금까지 이어진 역사의 주춧돌이 됐을까. 그 처음은 무엇일까. 그래서 준비했다, 한국영화의 ‘최초’들. 의미 대 흥미를 반반 섞었다.

1.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토’: 5000원 거액으로 제작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는 연쇄극(키노드라마)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영화가 아니라는 이견이 제기됐었다. 연쇄극은 연극(무대)과 영화(필름)가 결합한 공연 방식이다. 이러한 지적을 받아들여 현재는 ‘의리적 구토’와 같은 시기에 공개된 실사영화 ‘경성(京城) 전시(全市)의 경(景)’을 함께 한국영화의 효시로 인정하고 있다. ‘경성 전시의 경’은 경성의 명승지를 찍은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단 한 컷도 없다.

‘의리적 구토’는 계모의 간계로 가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선친의 유산까지 털리게 되자, 주인공이 정의의 칼을 뽑아 계모 무리를 물리친다는 권선징악적 내용이다. 하지만 줄거리보다 관객들 관심을 끈 것은 한강철교·장충단·청량리·남대문 등 서울 시내 곳곳을 배경으로 전차·자동차 등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감독 겸 주연은 당시 신극을 이끌었던 김도산, 제작비는 단성사 사주였던 박승필이 낸 5000원이었다. 그때 시골부자의 전재산이 1000원 정도였으니 5000원은 대단한 거액이었다. ‘의리적 구토’ 개봉을 앞두고는 박승필은 매일신보에 광고도 냈다. 최초의 한국영화 광고인 셈이다.

☞최초의 영화광고(매일신보 1919.10.27)=‘신파극좌 김도산 일행의 경성에서 촬영된 대연쇄극…경성의 제일 좋은 명승지에서 박혀 흥행할 작정으로 본인이 오천원의 거액을 내어…오는 27일부터 단성사에서 봉절개연을 하고 대대적으로 상장하오니 우리 애활가(영화애호가) 제씨들은 한번 보실 만한 것이다.’

2.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장안의 모던 걸’로 명성

이월화.
이월화.

한국인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극영화는 ‘월하의 맹서’(1923)로 알려져 있다. 조선총독부의 저축 장려 계몽영화였으나 한국인 감독과 배우에 의해 만들어져서 기록에 남았다. 윤백남(1888~1954)이 각본·감독을 맡은 ‘월하의 맹서’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가 등장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는 여자가 연극이나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은 금기시되던 시절, 여자 역도 예쁘장한 남자배우들이 여장을 하고 대신 했다. 이월화는 영화에서 주색잡기에 정신 못 차리는 약혼자를 계몽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약혼녀 역을 맡았다. 이월화는 젊고 아름다운 용모로 뭇남성들을 매혹시켰으며 ‘장안의 모던 걸’로 이름을 날렸다. 영화 데뷔 이후 스캔들이 끊이질 않았던 이월화는 인기도 로맨스도 시들해지자 일본으로 중국으로 떠돌아다녔다. 훗날, 1933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월화의 확실한 나이와 출생 등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1933년 동아일보 7월 19일자=‘이제 이월화의 이름 3자를 해부해 보자. 이월화의 성은 김도 아니고 이도 아니고 최도 아니고 박도 아니다. 이는 그가 이세상에 나오면서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몰랐으며 그의 어머니도 누구인지를 모르고 자라났다. 그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유모였으며 그 유모되는 이가 그 뒤 다시 어느 여자에게 수양딸로 주었기 때문에 영영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라났다….’

3. 최초의 키스신 ‘운명의 손’: 여간첩과 첩보대 대위

영화 '운명의 손'.
영화 '운명의 손'.

한국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입맞춤을 하기까지 걸린 세월은 어림잡아 35년이 넘는다.키스신이 등장한 최초의 영화는 1955년작 ‘운명의 손’이다. 내용은 이렇다. 북한 간첩이면서 바(bar)걸로 위장해 있던 정애(윤인자)가 고학생 영철(이향)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영철이 실은 첩보대 대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임무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사랑을 택하고 영철의 손에 죽는다. 키스신은 영철이 죽어가는 정애를 안고 슬퍼하는 이별장면에 등장한다. 말이 키스일 뿐, 그냥 잠깐 입술이라는 신체부위가 스쳤나? 착시현상을 준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당시 결혼한 상태였던 윤인자는 절대 못하겠다고 버텼다. 일주일 동안 이어진 설득에 결국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현장에는 감독과 촬영감독, 조명감독 외에는 출입금지였다.‘운명의 손’은 제작 당시는 화제가 됐지만 정작 개봉 때는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에 밀려 관객 동원에 실패했다.

☞동아일보의 평="한국영화사상 획기적 야심작"

4. 최초의 유부녀 배우 복혜숙: 시어머니 등쌀에 20대부터 할머니 역

복혜숙.
복혜숙.

요즘은 여배우의 결혼이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1920-30년대는 달랐다. 여배우가 결혼하고도 연기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해낸 여배우가 있다. 복혜숙이다. 1926년 ‘농중조’로 데뷔한 복혜숙(1904-1982)은 ‘낙화유수’(落花流水)로 스타가 됐다. 복혜숙은 자신의 공연 때마다 맨앞에 앉아 구경하던 열성 팬 김성진과 결혼했다. 의학도였던 그는 복혜숙보다 한 살 어리고 게다가 일찍 결혼했던 부인과의 사이에 자녀도 넷이나 있었다. 두 사람은 5년 열애 끝에 결혼, 복혜숙은 결혼 후에도 연기를 계속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니 촬영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복혜숙에게 남편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또 시어머니는 영화 속에서 복혜숙이 다른 남자와 부부 역할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복혜숙은 할머니, 그것도 혼자 된 할머니 역을 주로 맡았다. 1932년 ‘수업료’ 이후, 나이로 치면 28세 즈음부터 복혜숙은 모든 작품에서 할머니 연기를 했다. 이후 노역 연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돼버렸다.

☞복혜숙의 회고="밖에서나 인기있는 스타이지 집에 들어오면 남편 눈치 보기 바빴다.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했지만 결혼하지 말았어야 할걸… 하고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5. 최초의 연기자 양성학교 조선배우학교: 1기 졸업생 내고 폐교

조선배우학교 졸업생 이금룡.
조선배우학교 졸업생 이금룡.

영화라는 신문물이 들어온 초기에 ‘영화배우’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기생들이 연기를 하고 영화까지 만들던 시대였다. 하지만 영화계에서는 제대로 된 연기자를 키워 내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래서 최초로 연기자 양성을 내세우며 설립된 것이 조선배우학교다. 1925년 연극·영화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자는 야심찬 계획 아래, 이구영 등이 중심이 되어 와룡동에 터를 잡았다. 최초 신입생 12명이었으며 수업료는 한 사람당 월 3원이었다. 가난해서 그 수업료를 다 내는 이가 없었지만, 다행히 한 학생의 집안이 부유해 600원이라는 거금을 기증해 학교 운영을 할 수 있었다. 와룡동에서 창신동으로 옮겨 40명을 더 뽑는 등 확장을 했으나, 결국 운영난에 빠져 1기 졸업생만 내고 문을 닫았다. 그 1기 졸업생 가운데 ‘사랑을 찾아서’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던 이금룡과 복혜숙이 있다. 이 두 배우를 키워냈다는 것만으로도 조선배우학교는 그 의미가 있다.

☞이구영(1901-1973)=감독 및 시나리오작가로 초창기 한국영화를 개척했다. 배재학당 졸업 후 20세에 일본으로 영화 유학을 갔다가 1923년 귀국, 신문에 영화이론 소개 및 영화평을 썼다. 1925년 ‘쌍옥루’(雙玉淚)로 영화감독 데뷔를 했고, 대표적인 무성영화 ‘낙화유수’를 감독했다. 일제시대인 1935∼1945년 사이에는 일체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사진=KMDb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