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유부인' 한 장면.
영화 '자유부인' 한 장면.

1956년작 ‘자유부인’은 논란의 쟁점이 된 원작으로 유명하다.

영화의 원작은 작가 정비석이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서울신문에 연재한 소설이다. 대학교수 부인 오선영이 춤바람 나고 탈선행각을 저지르다 결국 남편의 용서로 다시 집에 돌아온다는 내용. 오선영의 탈선이 본격화될 때 독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논란이 점화됐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은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법학자 황산덕 박사가 공개적 비판을 가했을 때부터였다. 국내 최초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황산덕 교수는 형법학 법철학계의 큰 별로 후에 문교부 장관, 법무부 장관을 지낸 바 있다.

황 교수는 서울대 대학신문 1954년 3월 1일자 ‘자유부인 작가에게 보내는 글’ 제하에 "갖은 재롱을 부려가며 대학교수를 모욕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고로 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이에 정비석은 3월 11일 서울신문에 "교수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흥분한다"고 반박글을 썼고, 다시 황 교수는 "문화의 적, 문학 파괴자,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이라고 몰아붙였다.

논란은 정계 재계의 비리를 폭로했다 해서 관련인사들이 ‘북괴의 사주를 받은 이적소설’이라고 당국에 투서하는 지경까지 확대됐다. ‘이적’으로 표현한 것은, 당시 북한에서 이 소설에 묘사된 내용을 가지고 "남한은 지금 이렇게 속속들이 썩어가고 있다"는 선전공세를 폈기 때문이다. 황 교수가 표현한 ‘중공군 50만 명에 이르는 이적행위’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정비석은 치안국, 특무부대 등 고발과 투서가 들어간 곳마다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떠들썩한 논쟁은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냈다. 연재됐던 신문의 부수가 3배로 뛰어올랐고 상하권으로 묶어낸 단행본은 발매 3일 만에 초판이 매진됐다. 총 7만 부가 팔려나간 동명소설은 국내 최초의 베스트셀러로도 기록돼 있다. 이를 영화화한 ‘자유부인’은 10만 8000명 관객을 동원하며 1956년 흥행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정비석은 8년 후인 1962년 다시 회오리에 휩쓸렸다. 신문에 연재했던 소설 ‘혁명전야’의 몇 줄 때문이었다.

문제가 된 부분은 ‘돈 오십환이 생기면 고려대생은 막걸리를 마시고 연세대생은 구두를 닦고 서울대생은 노트를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대학생들을 보면 연세대학생은 연애의 대상이요, 고려대학생은 결혼의 대상이요, 서울대학생은 동경의 대상이라는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본 연대생들이 작가 집으로 몰려가 항의하는 바람에 결국 연재를 중단하고 해명서를 내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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