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생

 

향료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김광균(1914~1993)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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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기성의 도덕과 권위를 부정하고 문명과 도회적 감각,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고 추구하는 문예사조이다. 시문학에 있어서는 지성과 이미지를 중시하며 감정은 최대한 억제되고 객관성의 견지와 회화적 방법으로 감각을 표현한다. 김광균은, 시는 곧 회화이다, 라는 서구의 이미지즘 시론(詩論)을 실천했다. 공감각적 표현을 즐겨 사용했으며, 이미지의 공간적 조형기법을 처음 시도하여 크게 주목받았다. 우리나라 모더니즘은 감정을 절제하는 주지주의와 회화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미지즘, 그리고 기성의 관념을 거부하고 무의식을 중시하는 초현실주의로 전개되었다.

‘데생’은 선으로 대상의 형태와 이미지를 그려낸다. ‘데생’이란 제목이 암시하듯 한 폭의 회화 같은 언어다. 해질녘 사물들이 어둠에 잠겨드는 것을 아쉬워하며 시인이 들길을 걷고 있다. 구불구불 이어진 ‘들길’은 화자의 고독한 내면이기도 하다.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 끝자락에서 땅거미가 오고 이윽고 ‘전신주 하나’가 서서히 어둠에 잠긴다. 뒤이어 먼 ‘고가선 위에’ 별이 하나 둘씩 떠오르며 ‘밤이 켜진다.’ ‘향료를 뿌린 듯 곱단한(곱다란) 노을’은 시각을 후각으로 바꾼 공감적 표현이다. 목장과 과수원이 있은 들길 풍경은 ‘불면 꺼질 듯’ 사무치게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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