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열
정창열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독일 정부의 공식 초청으로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독일을 방문했다. 권 장관은 독일 통일의 날 32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슈타인 마이어 독일 대통령을 예방,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에 대한 설명과 지지를 부탁하는 등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이에 대해 북한의 대외 선전매체인 메아리는 20일 ‘대결에 환장한 자의 망령’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윤석열 역도의 담대한 구상을 요란스럽게 광고해대면서 그에 대한 지지와 협조를 비루하게 구걸해 댔다"라고 했다. 이번 독일 방문은 우리 정부가 흡수통일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했다. 특히 메아리는 "역대 괴뢰 통치배들 치고 흡수통일 망상을 꿈꾸지 않은 자가 없지만, 해외에서까지 공공연히 ‘통일된 조선반도(한반도)의 모습은 통일된 독일의 모습과 동일할 것’이라며 흉악한 체제 대결에 피눈이 돼 날뛴 극악한 반공화국 대결 광신자는 없었다"라고 맹공격했다.

우리는 독일 통일을 으레 동독이 서독으로 편입된 흡수통일로 평가하지만,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대결이라는 냉전 구도에서, 게르만 민족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라는 원죄 때문에 인위적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다가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시작한 ‘민주화 운동’이라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평화적인 통일을 이뤘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한 평가다.

다만 통일 과정에서 가정(苛政)으로 국민을 억누르던 동독의 공산정권이 도태됐을 뿐이다. 심지어 통일 직후 악명높은 정보기관인 슈타지와 동독 고위층, 관료,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권침해, 불법행위에 대한 전면 재조사와 재판에서도 국민화합 차원에서 처벌도 최소화했다. 법률남용과 인권유린 범죄 230건, 동독 탈출 인민을 사살한 군인 약 180명을 살인죄로 기소했을 뿐이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통일이었다.

물론 통일이 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일은 이른바 오씨(Ossi:옛 동독사람)와 베씨(Wessi:옛 서독사람)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갈등이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다. 통일 전 40여 년간 지속된 이질적인 정치·경제 환경에서 비롯된 사회현상이다.

브라질의 마나우스라는 곳에는 아마존강의 지류인 네그루강과 솔리모에스강이 합류하는 지점이 있다. 각각 검은색과 황토색을 띤 두 강은 서로 섞이지 않은 채 약 6㎞를 흘러간다. 두 강의 온도와 유속, 그리고 퇴적물의 성분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나우스의 두 물줄기가 결국 아마존강으로 합쳐지듯, 독일의 갈등도 곧 극복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북쪽의 김씨 정권은 통일독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 김일성은 독일 통일과 함께 이보다 1년 전에 있었던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의 비참한 최후를 목도했다. 그 뒤를 이은 김정일, 김정은은 정권의 몰락을 가져올 흡수통일(실제로는 평화통일)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DJ가 추진한 햇볕정책에 대해 초기에는 ‘변형된 흡수통일 음모’로 비난하는가 하면, 저들이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의한 제도 통일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체제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할 정도로 남북의 국력 격차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종의 자기 컴플렉스다.

이런 상황에서, 1991년 9월 남북 유엔 동시 가입으로 최소한의 체제 안전장치를 마련한 김씨 정권은 지난 30년간 핵과 미사일 능력을 강화했다. 이제는 ’핵 선제 사용‘ 발언까지도 서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평화통일은 전혀 염두에 없으며, 기회가 마련되면 핵무기를 사용해서라도 대한민국을 침탈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미망에 빠진 김정은이 명심해야 할 역설(逆說). 본인에게까지 독재 권력이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은 자의든 타의든 북한이 대남 전면도발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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