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19) 문답으로 알아보는 주사파 특징

이성적 학습·이론보다는 집단적 감성·선동에 의존하는 경향 짙어져
봉건 왕조로 변질된 北에 대한 비판의식 상실...'인권문제' 눈 감아
이론 논쟁 들어가면 실질적 대안 제시하는 각론에선 형편없는 모습

90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학생운동이 대안으로 삼던 ‘사회주의’는 더이상 대안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북한 김일성 체제는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에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넘어가면서 ‘민족해방민중(인민)민주주의혁명론(NLPDR)’과 주체사상으로 일색화 되었다.

따라서 92년 대선과 93년 한총련 출범 이후 학생운동은 주사파, 즉 김일성주의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주체사상’ 즉 김일성주의는 기존의 사회주의, 즉 맑스 레닌주의와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번 연재에서는 주사파(김일성주의)에 대한 특징을 문답 형식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주체사상의 이론을 정립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주체사상은 기존 공산주의 노선에서 벗어난 북한의 독자적인 사상체계였다. 김정일은 이를 더욱 변형시켜 수령 유일 독재이론으로 변질시켰다.
주체사상의 이론을 정립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주체사상은 기존 공산주의 노선에서 벗어난 북한의 독자적인 사상체계였다. 김정일은 이를 더욱 변형시켜 수령 유일 독재이론으로 변질시켰다.

1문: 주사파는 어떻게 재야 학생운동권에 정착했나?

답: 해방 후 대한민국 좌익운동 계열은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 계열과 북한 노동당에 의해 직접 지도된 북로당 계열(성시백 계열)로 나뉜다. 남로당 계열에 의해 1차 인혁당 사건(64년)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 74년)이 일어난다. 반면 북로당 계열은 6.25이후 궤멸되었다가 남파된 간첩과 연결되어 탄생하게 된다.

그것이 통일혁명당(총책 김종태)이다. 그들은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 서울대 문리대 중심으로 통일혁명당을 조직하고,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 북한과 내왕하는 기지를 건설한다(임자도 간첩단 사건). 통혁당이 검거된 후에도 북한은 지하당 건설 공작을 벌였고, 이것이 4~5회에 걸쳐 통혁당 재건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적발되었다.

79년 10월 통혁당(북로당계열)과 인혁당(남로당계열) 세력의 통합을 시도한 남민전 사건이 일어났지만, 학생운동과의 연계는 밀접하지 않았다. 여전히 ‘반미’문제는 좌익 지하당과 학생운동 사이에 넘지 못할 벽이었다. 하지만,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경험하며, ‘맑스 레닌주의’와 ‘반미의식’이 학생운동권에서 일반화되면서 그 차이가 좁혀졌다.

85년 미문화원 점거, 그리고 CNP(시민혁명, 민족혁명, 인민혁명) 논쟁과 사회구성체 논쟁에 따라 ‘맑스 레닌주의 사상’이 학생운동권에 일반화되고 ‘반미운동’을 전면에 내세운 ‘자민투’가 만들어지면서 ‘NLPDR 노선’과 주체사상이 재야, 학생운동권에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남민전 관련자가 감옥에서 출소하여 학생운동권과 만나고 ▲85년 ‘통혁당 소리방송’이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방송’으로 바뀌면서 이론과 혁명투쟁에 대한 북한의 지시가 강화되고 ▲남파 간첩들의 지하당 공작(윤택림, 이선실 등)이 진행되면서,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학생운동, 노동운동, 재야운동에 만들어졌다.

구국학생연맹(서울대), 애학투련, 반미청년회(고대), 구국학생동맹(연세대) 등 각 대학 ‘언더 써클’이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혁명조직(RO)으로 재편되었다. 그중 반미청년회(조혁)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었고, 전대협을 탄생시키는 배후가 되었다. 이후 학생운동권은 ‘자민통(서울동부)’, ‘조통(서울 서부)’, ‘관악자주파(서울대)’ 등 전대협을 배후 조종하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통일운동이 강화되면서 전대협에서 주체사상파의 지위가 확고해졌고, 범민련, 범청학련이 만들어지면서 북한과 직접적인 연계가 강화된다. 특히 ▲통일운동 중심의 투쟁전략 ▲남과 북 해외의 2자 연대조직인 범민련과 범청학련 ▲한민전 구국의 소리방송에 의존하는 전대협, 한총련의 직업적 ‘언더 지도부’가 주사파 일색화를 재촉했다.

2문: 맑스 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의 차이는?

답: 맑스주의는 철학적 관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사물에 내재된 대립물의 투쟁으로 사물의 변화발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사적 유물론에서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 투쟁으로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레닌주의는 맑스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해야 사회주의로 전환"된다는 단계적 발전론에서 저발전 국가인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에 의한 사회주의혁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레닌주의는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당 조직’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노력이 강조되었다.

주체사상은 ‘맑스 레닌주의의 유물론’을 계승하지만,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에 의해 역사발전이 이뤄진다"고 주장하여, 유물론적 ‘역사발전관’을 변형하였다. 맑스는 "‘관념철학’은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라고 공격했는데, 주체사상이 사실상 ‘유교적 관념론’에 기울면서 북한의 봉건 지배 이데올로기로 바뀐 것이다.

1982년 3월 18일에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04 (대청동2가)에 있는 당시 부산 미국 문화원(현 부산근대역사관)에 불을 질렀다. 1980년 5·18에 대한 미국의 방관적 자세가 반미정서를 자극해 일어난 사건이다.
1982년 3월 18일에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04 (대청동2가)에 있는 당시 부산 미국 문화원(현 부산근대역사관)에 불을 질렀다. 1980년 5·18에 대한 미국의 방관적 자세가 반미정서를 자극해 일어난 사건이다.

3문: 주체사상의 특징은?

답: 북한의 주체사상, 즉 김일성주의는 ▲관념화, ▲민족주의화, ▲유교화 된 ‘맑스 레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에 의해 역사발전이 이뤄진다는 것이 주체사상의 역사발전관이다. 이것을 주체사상은 ‘사람 중심의 철학’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 중심의 역사발전관에서 핵심은 ‘사회유기체론’이다. 즉,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관계를 맺고 조직을 만들게 되는데, 그렇게 구성된 공동체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유기체는 팔, 다리와 같은 말단 촉수의 역할이 있고, 심장의 역할이 있고, 뇌수의 역할이 있는데, 노동당과 수령이 심장과 뇌수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주장을 편다. 이것이 바로 ‘수령론’이다. 또, 수령의 영도를 옆에서 배우고 학습한 후계자가 계승하게 되는데, 이것이 ‘후계자론’이다.

‘사회유기체론’, ‘수령론’, ‘후계자론’이 주체사상의 핵심 내용이다. 주체사상이 왜, 맑스 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유교적 관념론’으로 수정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주체사상에서 ‘사람 중심의 철학’과 ‘사회유기체론’, ‘수령론’, ‘후계자론’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4문: 주체사상의 탄생 과정은?

답: 주체사상의 시작은 60년 말 중소 분쟁 과정에서 독자적 노선을 모색하면서 탄생했다. 즉, 중국과 소련의 분쟁 와중에 줄타기 외교를 했던 북한의 처지에서 독자적 사상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이 김정일의 노동당 선전부장 진입으로 본격화된 것이다.

이는 주체사상의 탄생 과정에서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와 김정일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김일성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미화하는 작업과 함께, 북한 주민들에 대한 사상 교양과 김정일 후계 구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수령론’과 ‘후계자론’은 김정일 후계 구도가 완성되어가던 1982년 전후로 완성되었다. 더욱이 김정일의 대학 졸업논문인 ‘조선민족형성론’과 김일성 대학의 주체사상연구소(소장 박승덕)에서 집필된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 등이 나오면서 완성되었다.

5문: 대한민국 주사파의 특징(장점과 단점)은?

답: 초기 재야 학생운동권에서 주체사상이 자리 잡은 것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 투쟁 과정에서 ‘반미주의’가 일반화되고,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방송’과 ‘직선제 개헌 투쟁’과 같은 대중노선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초기 주사파의 경우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 ‘식민지 반(半)자본주의론’ 등 한국 사회에 대한 사회구성체 논쟁이나 ‘NLPDR론(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등 이론적인 논쟁과 철학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재판현장.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시간 만에 형이 집행돼 당시 박정희 정권은 '사법살인'을 자행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재판현장.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시간 만에 형이 집행돼 당시 박정희 정권은 '사법살인'을 자행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론 투쟁이 전개되는 ‘언더 서클’의 해체와 총학생회 중심의 운동체계로 선전 선동과 문화패 활동에 주력함으로써 이론적 깊이가 얕아지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저항적 ‘민족주의론’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더구나 전대협, 한총련의 ‘언더 지도부’가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방송’에 의존함으로써 이론적 능력이 한층 부족해졌다.

그러므로 주사파로 일색화 된 한총련 이후 학생운동은 ▲한민전 구국의 소리방송 의존도 심화(북한 의존도 심화) ▲저항적 민족주의 경향성 강화 ▲이성적 학습과 이론보다는 집단적 감성과 선동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총련 이후 대한민국 주사파는 ‘NLPDR론’과 ‘주체사상파’의 초기 모습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북한 의존도가 강화되고, 집단주의적 경향성을 띠게 되었다. 이것이 ▲독자적 통일운동보다는 범민련 등 3자 연대에 의한 범민족대회를 고수하고 ▲북한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북한 동포돕기 운동’을 거부하고 ▲96년 연세대 사태 일으키는 등 맹목적이고 집단주의적인 모습을 보인 이유이다.

그러므로 한총련 이후 주사파들이 봉건 왕조체제로 변이된 북한에 대한 비판의식이 상실하고,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에 대해 눈을 감고 있는 것, 그리고 반미, 반일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며 일본이나 서양의 ‘극우파’적 경향성을 띠는 것이다.

따라서 주사파의 장점과 단점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장점으로는 ‘집단주의적 선전과 선동능력’이 높다는 것이다. 각종 문화패 활동, 집단적 감성에 대한 호소, 그리고 음모론 등을 동원한 선전 선동과 조작 능력이 대단히 출중하다.

반면, 감성적이고 집단적인 선전 선동에 의존하다보니 이성적이고 이론적 능력과 판단이 매우 뒤진다. 선전과 선동을 위한 감성적 ‘레토릭’에는 대단히 강하지만, 이론적 논쟁에 들어가면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총론적인 비판능력은 높지만,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각론에서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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