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증권가. /연합
서울 여의도 증권가. /연합

자금시장에서 은행의 위상과 역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 발행이 막히는 등 돈줄이 마르자 대기업조차 앞다퉈 은행으로 달려가고 있다. 돈이 넘치는 자산가들은 예금금리가 6%에 육박하자 주식과 암호화폐 등 위험자산에서 은행 예적금으로 갈아타는 역머니무브 현상도 가속화되고 있다.

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기준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의 대기업 대출 잔액은 106조3000억원으로 전월 말의 100조5000억원보다 5조8000억원 급증했다. 같은 기간 중소기업 대출도 594조4000억원에서 597조5000억원으로 3조1000억원 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시중자금도 은행으로 몰리고 있다. 정기 예적금, 기업자유예금, 저축예금 등 은행의 저축성 예금은 지난 6월 말 기준 1557조원으로 지난해 말의 1511조원 대비 46조원 증가했다.

특히 10억원 초과 고액계좌의 예금 규모는 지난 6월 말 기준 787조9000억원으로 지난해 말의 769조7000억원보다 18조2000억원 늘었다. 10억원 초과 고액계좌의 금액뿐만 아니라 계좌 수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10억원 초과 고액계좌 수는 올해 6월 말 9만4000좌로 지난해 말 대비 5000좌 증가했다.

이처럼 은행의 저축성 예금이 급증한 것은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 인상한 한국은행의 빅스텝 영향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12일 기준금리를 종전 연 2.50%에서 3.00%로 인상하는 빅스텝을 단행했는데, 이후 은행은 정기예금 금리를 최대 연 1%포인트가량 인상했다.

은행이 자금시장의 블랙홀이 된 것은 자금유치 경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코로나19 국면에서 완화된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 규제가 지난 7월부터 단계적으로 정상화되면서 은행은 수신고를 쌓아야 했고, 이는 예적금 금리를 올려 자금을 확보하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유동성커버리지비율은 향후 1개월간 순현금 유출액에 대한 고유동성 자산의 비율이다. 일시적으로 은행에서 뭉칫돈이 이탈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제다.

앞으로도 은행으로의 자금 쏠림현상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정부의 자금시장 안정화 방안에 따라 은행의 주요 자금조달 수단 중 하나인 은행채 발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이렇게 되면 은행의 예적금 등 수신 의존도는 더 높아지게 된다. 금융권에서는 현재의 5%대를 뛰어넘는 연 6%의 정기예금 상품도 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형 증권사도 경쟁적으로 금리 인상에 나서고 있다. 발행어음 금리를 올려 은행의 고금리 예금으로 빠져나가는 개인·법인자금 확보에 나선 것이다. 발행어음은 증권사가 자체 신용으로 발행하는 만기 1년 미만의 단기 금융상품이다.

금융당국이 자금시장 경색을 해소하기 위해 은행과 증권사 등에 채권 발행 자제를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동성 확보를 위한 대형 증권사의 수신 경쟁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실제 한국투자증권은 최근 1년 만기형 발행어음 특판 상품의 금리를 5.7%까지 올렸다.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동일 상품을 연 4.5%의 금리로 판매했는데, 불과 한 달 만에 금리를 1.2%포인트나 올린 셈이다.

발행어음은 자기자본이 4조원을 넘는 대형 증권사만 취급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현재 미래에셋증권,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KB증권 등 4개 증권사만 발행하고 있다.

반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 부실화로 유동성 위기에 빠진 중소형 증권사는 자금조달을 위해 자산 구조조정에 돌입한 상태다. 프로젝트파이낸싱 자산유동화증권(ABS)의 차환 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부 중소형 증권사는 금리를 대폭 올린 기업어음(CP)이나 전자단기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돌려막고 있다. 전자단기사채는 단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종이가 아닌 전자 방식으로 발행하는 채권을 말한다.

일부 중소형 증권사는 상장지수펀드(ETF) 등 보유 금융자산을 매각해 현금을 확보하는 등 비상경영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업계에서는 9개 대형 증권사가 중소형 증권사 지원을 위해 프로젝트파이낸싱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매입할 특수목적법인(SPC)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모집 자금이 5000억원에 불과하다. 실제 자금이 투입되기까지도 적지 않은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자산 구조조정 등 중소형 증권사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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