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신
임명신

2주 전 미국 뉴욕타임즈 칼럼 ‘땡큐, 시진핑’이 눈길을 끌었다. 요지는 이렇다. 중국이 조만간 세계 최고가 될 줄 알았더니 지난 십년 옛소련을 닮아 가더라, 중국공산당의 실상을 인식시켜줘 고맙다, 미국사회의 리더들이 비록 불완전하고 과거 미덕도 퇴색했으나 중국을 대안으로 삼고 싶지 않다(중화문명과 공산혁명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걸 이제 알았나’ 할 것 같다). 칼럼 제목·내용 모두 ‘야유’가 분명하지만 사실상 일종의 ‘정신승리’다. 개혁개방 40여년의 성취를 거들며 결실을 함께 누린 서방 엘리트의 총체적 패배선언을 대변하는 듯하다.

부유해지면 자연히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다? 서방의 착각이자 자기정당화 아닐까. 중국은 인류사 최장 최강의 전제적 절대권력이 지속된 곳이다. 이집트나 서유럽의 절대왕권은 오래 전 끝났거나 19세기 이전 150~200년 정도 있었을 뿐이다. 반면 신해혁명으로 태어난 중화민국 약 40년과 개혁개방 이후 30여년 집단지도체제를 제외하면, 중국에선 최소 2000년 이상 ‘절대권력 1인 지배체제’였다.

기원전 4세기 현인 맹자가 ‘세상이 질서 잡혔다 흐트러졌다 하는 것’을 ‘일치일란’(一治一亂)으로 표현했는데, 루쉰(1881~1936)이 수천 년 중국사를 그 한마디로 짚어낸 바 있다. 왕조들끼리 통일-분열을 반복했을 뿐 ‘역사의 진전 없는 순환’이었다고 본 것이다. 이 유구한 관성에 근대적 애국주의가 결합한 중국, ‘고마워요 시진핑’은 오히려 우리가 할 소리다. 덕분에 중국의 이웃이라는 숙명의 무게를 평범한 시민들까지 느끼게 됐다.

미국이 지구촌 온갖 일에 관심 접은 채 천혜의 자기땅에서 홀로 잘먹고 잘살기만 챙긴다면? 합법적 중국화는 시간문제다. 인해전술이 전쟁 때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사회 주류에 우호세력이 있는 대한민국의 경우 훨씬 다루기 쉽다. ‘사드 보복’ 식 괴롭힘도 힘들지만 달콤한 유화책 역시 무섭다. 아니, 더 위험하다. 대국적 관용, 한자와 무수한 고전으로 대표될 흡인력에 매료되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조선이 청나라에 ‘사대’하면서도 오랑캐라 멸시하며 심리적 거리두기가 가능했던 측면이 있다. 여러모로 문제적인 ‘소중화’ 자부지만, 문명의 적통 의식을 통해 중국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키웠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훗날 근대 민족주의로 빠르게 전환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중국 옆에 살자면 ‘멀리 사는 힘센 친구’가 필요하다. 그게 미국인데, 바이든 정부의 패착이 거듭돼 걱정이다. 전선을 세 군데나 벌여 놓은 점(동북아 중동 유럽), 특히 중국·러시아를 ‘한 편’ 만든 게 치명적이다. 냉전 때조차 대립하던 양자가 부쩍 가까워졌다. 우크라이나전쟁의 최대 최종 수혜자는 중국이다. 관련국들이 고전할수록 중국은 살아난다. 중동의 세력균형도 깨졌다. ‘미국 절친 사우디’마저 불구대천이던 ‘반미 이란’과 관계개선을 시도하며 중·러에 기울고 있다. 서유럽이 대러제재로 에너지 대란에 빠진 가운데, 독일은 중국 품에 다시 안길 기세다. 우량 기업 다수가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거나 매도될지 모른다.

우크라이나전쟁엔 동·서유럽 종족들의 해묵은 반목과 갈등, 21세기 에너지패권 등 지정학·지경학이 얽혀 있다. 이 전쟁을 자유민주-파시즘의 대결로만 본다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 중간선거가 다음주로 다가왔다. 연방하원 전원, 상원 3분의 1, 주지사 등이 바뀐다. 사전선거 열기 또한 여느때보다 뜨겁다. 전쟁 여파로 물가·휘발류가가 오르며 일상이 빠듯해지자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여론은 악화일로. 대부분 이번 선거와 2년 후 대선의 공화당 대승을 예측한다. 대한민국으로선 고차방정식 생존의 지혜가 한층 절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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