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우표는 발행국의 문화적 이상, 역사적 서사, 정치적 이념이 반영된 정부의 예술품이다. 발행국의 시각적 수사학을 국경을 넘어 전 세계에 퍼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우표는 인터넷 광고에 가깝다. 스파이는 우표의 이런 속성을 정보활동에 적용했다. 스파이는 우표를 전쟁 무기로 활용했다. 스파이는 우표를 세상을 바꾸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스파이는 우표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은밀하게 노출시켰다. 스파이는 우표를 통해 상대방이 숨긴 의도를 알아 챌 수 있었다.

2차 대전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통신은 상당부분 우편에 의지했다. 그러나 받은 편지가 진짜 레지스탕스 동료가 보낸 것인지, 독일 방첩기관이 보낸 것이지 식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적잖은 레지스탕스 요원들이 독일의 함정수사에 걸려 체포됐다. 레지스탕스를 지원하던 영국 정보기관이 프랑스 우표를 위조했다. 레지스탕스 공식 지령 우편에는 영국에서 만든 위조 우표만 사용됐다. 독일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우표 위조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우표가 전쟁에서 무기로 활용됐다.

1960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보낸 우편물들이 뜯지도 않은 채 미국으로 반송됐다. 받는 사람의 주소도 정확했고 내용물도 하자가 없었지만, 반송된 모든 우편물엔 반공주의자로 유명한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마사리크(Tomas Masaryk)의 우표가 붙여져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은 "우표를 체코슬로바키아에 반대하는 선전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국무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이것은 CIA의 문화공작 ‘자유의 챔피언(Champion of Liberty)’이었다. 정상적 언론과 단절된 나라 사람들에게 우표 속 인물에 대한 기억을 통해 자유에 대한 의지를 강화시키려는 것이 공작의 목표였다. 자유 베를린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전 서베를린 시장 로이터(Ernst Reuter)의 우표도 발행됐다. CIA는 1957년부터 1961년까지 남아메리카·헝가리·폴란드 등 외국 지도자 10명을 우표로 발행했다. 우표가 세상을 바꾸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1952년 프랑스·서독·이탈리아·벨기에·룩셈부르크·네덜란드가 서유럽 방위를 목적으로 유럽방위공동체(EDC)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동독은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해 봉기를 주도했던 프로이센 군인 페르디난트 폰 쉴(Ferdinand von Schill)의 우표를 발행했다. CIA는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민족주의 감정을 조장하기 위한 동독의 선전활동으로 분석했다. CIA 예측대로 프랑스는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부활되는 것이 두려워 유럽방위공동체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다.

1986년 2월, 헝가리가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승무원을 추모하는 우표를 발행했다. 부다페스트 주재 미국 대사는 ‘이념적 장벽을 넘은 행위임이 분명하다’며 CIA 국장에게 우표 발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지를 보냈다. 우표는 일반 시민은 물론 전 세계 모든 커뮤니티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발행국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우표는 냉전시대 미국 정보기관이 소련 블록 국가의 숨겨진 의도와 정책에 대한 단서를 입수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됐다.

세계 최고 폐쇄국가 북한에서 우표는 우편물에 붙이는 단순한 증표가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외부로 표출하는 종이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다. 1946년부터 2020년까지 남한이 4,700여 종의 우표를 발행한 데 비해 북한은 무려 7,200여 종의 우표를 발행했다. 주요 정책이나 계기, 기념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의미를 우표로 담아 발행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6일, 북한이 ‘핵무력 정책 법제화’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온라인 선전의 시대에도 우표가 여전히 공개정보(OSINT)의 대상임을 일깨워 주는 사례다. 스파이와 우표! 스파이에게 무관한 건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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