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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은 오락·치유, 예술이자 학습의 장이었다. 운명의 피해자 ‘오이디프스 왕’, 운명의 개척자 ‘프로메테우스’ 등 그 시절 히트작은 오늘날까지 각종 창작의 영역에 영감을 주며 재해석된다. 주인공과 합창단이 대사와 노래로 주거니 받거니, 관객들은 슬픔·경악·두려움을 동반한 극도의 괴로움을 맛본다. 사랑·질투·복수·죽음·이별 등 삶의 다양한 무늬가 당대의 정치·사회 현실과 어우러졌다.

당시 연극의 필수 요소인 합창단이 ‘염소 탈’을 쓰고 공연했다는 게 특히 흥미롭다. 이들의 노래가사나 추임새가 인간의 속내와 민낯을 꼬집으며 주인공 영혼을 뒤흔든다. 염소는 다른 수컷의 짝인 암컷을 향해 잘 추근대고 제짝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 무심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때문인지 서구 문화에서 염소는 ‘호색한’의 대명사로 통한다. 디오니소스(술·연극의 신)의 절친, 사티로스(숲의 정령)가 상반신 하반신 각각 사람과 염소 모습을 한 것 역시 이런 해석의 연장이다.

사티로스적 감성을 상징하며 염소 탈을 쓴 사람들의 합창, 진퇴양난 속에 고뇌하는 주인공, 이들에게 감정이입한 관객이 어우러져 디오니소스적 축제의 한마당을 벌였다. 이를 ‘트라고이디아’라 불렀는데, 트라고스(염소)와 오이디아(노래)의 합성어다. 여러 유럽어에 비슷비슷한 발음으로 정착했고, 그 중 하나가 영어 ‘Tragedy트래저디’다. 영웅 서사시를 풀어낸 정통연극을 뜻하던 말이 불행한 결말을 가진 서사의 통칭 내지 비유로 쓰이게 됐다. ‘Tragedy’는 19세기 일본에서 ‘悲劇히게키’로 옮겨져 한국어 중국어에 들어온다.

일본 특유의 미의식이 신조어 ‘悲劇’의 탄생에 작용한 것 같다. 일본인들은 ‘悲’ 역시 아름다움의 한 형식으로 본다. 근대 이전, 중화문명의 중심부인 중국이나 조선에선 悲와 劇이 한 단어로 존재한 바 없다. 불가항력적 우연적 요소가 겹쳐 벌어진 답 없는 사태의 심미적 재현, 즉 트라고이디아의 전통이 구축되거나 복원되지 못했던 것이다. 강력한 도덕주의 명분론에 오래 지배당한 결과일 것이다. 자연히 인생사의 각종 달레마에 대한 이해력이 약하고 ‘니편내편 갈라치기’ 식 태도는 강해진다.

비극됨의 본질이란 불행의 표면적 강도라기보다 이분법적 판단의 불가능성 아닐까. 아울러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淨化) 즉 ‘씻김의 미학’이 작동해야 한다. 고통스런 공감을 거쳐 정신적 고양, 안도감 담담함 너머의 포용을 가져다 줄 때 비로소 비극이다. 우리현대사의 불행한 중대 사건들은 좀처럼 비극으로 승화되질 못했다. 수습과 예방책 마련이 핵심일 사고조차 ‘제사(祭祀)’의 구실이다. 아픈 기억은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환되고 증폭된다. 제사가 많아지고 제사장들이 득세하면 건강한 공동체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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