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기
홍성기

1998년 6월 3일 독일 북부의 에셰대 근처를 지나가던 고속열차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객차의 쇠바퀴가 찢어지면서 객차 바닥을 뚫고 올라왔고, 마침 이 순간 육교 밑을 지나가던 열차의 후미 객차들이 육교와 충돌하면서 잭나이프처럼 접혔다. 현장에서 101명이 사망하고 70명이 중상을 입는, 독일에서 가장 큰 열차 사고로 기록됐다. 2주일이 지난 6월 17일 독일 의회에서 교통부 장관이 잠정적인 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실제 원인 규명은 프라우엔호퍼 연구소에서 담당했다.

‘이 참사의 책임자에 대한 재판’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음 해인 1999년 8월, 유일하게 생존한 객실 차장의 직무유기에 대한 재판은 정지됐다. 열차 승무원이 사고를 예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2001년 3월에는 바퀴의 미세 균열과 관련하여 유지·보수를 책임졌던 철도공무원에 대한 소송이 중단됐다. 미세 균열 발견에 필요한 초음파 진단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001년 11월 독일 검찰은 철도청의 주요 책임자 3명을 기소했고, 다음 해 2002년 8월 첫 재판이 시작됐다. 그러나 2003년 4월 54번째의 재판이 열린 날, 재판부는 피고 3명에 대해 각각 1만 유로의 벌금을 부과하고 재판을 끝냈다. 왜냐하면 일본과 스웨덴, 남아프리가 등의 전문가들이 프라운엔호퍼 연구소와 다른 의견을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유가족들은 재판부의 결정에 분노하여 헌법재판소에 소원을 제출했으나 같은 해 8월 기각됐다. 에셰대 고속열차 참사 발생 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이르기까지 5년 2개월 동안, 책임자 처벌은 사실상 없었다.

이태원 참사는 단순 살인사건이 아니라 유흥성 축제 인파에 의해 발생한 대형 압사 사건이다. 물리적으로는 한 피해자가 동시에 다른 피해자의 사망 원인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 이런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은 원인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것을 ‘인과망’이라고 부른다. 바꿔 말해 이처럼 복잡한 인과망을 조사해 객관적으로 결론을 내리려면 많은 인력과 시간 그리고 엄정함이 요구된다. 이때 법적 책임자가 없이도 대형 참사가 일어날 수 있음은 앞에서 언급한 독일 에셰대 기차 사고가 말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다. 이 점을 이해해야 유사 사고의 재발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첫째, 참사가 발생하기까지의 과정, 둘째, 발생 후 관계 기관의 대응, 마지막으로 대형 참사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단계의 경우 아마도 매우 광범위한 조사가 불가피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언론은 사고 당일 10만이 넘는 인파가 예상되어 대형 사고의 가능성이 예견됐기에 책임자 문책을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의 공영언론 KBS·MBC 등은 수년 동안 촛불시위 인파를 부풀려 보도했다. 광화문에 150만 명은 기본이고 200만 명 정도가 수시로 모였다. 해서 10만 명 인파란 한국인에게 초등학교 운동회 수준으로 인식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두 번째 경찰의 늦장 대응으로 사망자가 더 늘어났을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지만, 여기서도 ‘선(先) 사실 확인, 후(後) 책임 추궁의 원칙’이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 매우 이해하기 힘든 보고체계의 미작동도 그 원인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책임 추궁보다 중요하다. 크던 작전 사고를 완전히 예방할 수 있는 국가는 없고, 따라서 완전 예방이 국가의 존재 이유도 아니다. 대형 참사 후 이성적 판단에 의한 재발 방지 노력이 바로 국가의 존재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는 대형 사고가 일어나면 그 직후부터 책임자 처벌을 주장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선박사고가 늘어났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한국 대중사회의 분노성 책임추궁 중독은 다음 대참사의 바로 그 원인이다. 재발 방지에 필요한 에너지가 ‘참사의 정치화’로 한 입 베먹으려는 자들의 뱃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