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의 이단아들]"詩人을 추방하라"··· 예술적 모방 혐오한 플라톤
[예술사의 이단아들]"詩人을 추방하라"··· 예술적 모방 혐오한 플라톤
  • 박석근 문화 에디터
  • 승인 201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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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1511년 작 '아테네 학당' 부분 확대. 플라톤(왼족)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라파엘로의 1511년 작 '아테네 학당' 부분 확대. 플라톤(왼쪽)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서양철학의 시원(始原)은 고대 그리스 사상이다. 고대 그리스는 그래서 생명의 진화가 시작된 바다에 비유된다.

"모방은 진리와 동떨어져 있고, 분별력을 방해"

인간의 예술적 활동에 대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그래서 나온 게 ‘모방론’ 또는 ‘모사론’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예술 활동을 그닥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실재의 재현’에 대한 플라톤의 부정적 평가는 그의 저서 <국가> 제10권에 명확히 나타난다. 그는 회화와 시로 대표되는 예술 활동을 두 가지 이유에서 비판한다. 첫째, 모방은 진리와 동떨어져 있다. 둘째, 모방 행위는 분별력(판단력 또는 비판력)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그나마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

모방이 진리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도구와 물감 따위를 사용해서 그린 그림은 사물의 실재를 나타내지 못한다. 화가는 자신의 눈에 비치는 사물을 묘사할 뿐, 사물의 진리를 나타내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눈에 보이는 형상만을 모사할 뿐이다. 그러므로 회화란 사물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참되지도 않다. 플라톤은 또 말한다. 예술은 진리로부터 두 단계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식의 원천으로 쓰일 수 없다. 예컨대 의자를 만드는 데 쓰이는 목재가 있고 다음으로 그것을 가공하는 목수가 있다고 하자. 나무는 목수의 손을 거쳐 의자가 되는데, 이것이 첫 번째 단계의 모방이다. 두 번째 단계로 화가는 목수가 만든 의자를 그린다. 따라서 화가의 그림은 본질에서 두 단계나 떨어지게 된다. 

'오이디푸스왕'을 보고 슬픔에 빠진다면 어리석은 일

모방 행위가 분별력(판단력 또는 비판력)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는 설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분별력이란 어떤 상황을 바르게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의 관람을 예로 들어보자. 관객들은 작품을 감상하며 깊은 슬픔에 빠진다. 극장관람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관객들은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비극시를 감상하면 슬픔과 고통은 두 배가 된다. 인간의 이성은 마비되거나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상과 감성이 자리 잡는다. 인간은 때때로 슬픔이나 갈등 번민에 사로잡히고,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에 의한 행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와 같이 분별력 있는 행동은 따라 하기 어렵다. 반면에 슬픔이나 갈등, 번민처럼 비이성적 감정과 행동은 따라 하기 쉽다. 시는 이러한 부정적 감정을 대중에게 퍼트리는 전염병 같은 것이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요한 페터 크라프트 作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요한 페터 크라프트 作

'이상 국가'의 지도자는 반드시 '哲人'이어야했다

플라톤은 ‘이상 국가’ 건설을 꿈꾸었다. 그 ‘공화국’의 지도자는 반드시 철인(哲人)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에 비해 이성이 발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성의 법칙을 어지럽히는 시인들은 ‘공화국’의 장애물일 뿐이다. 시 창작 과정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그들은 ‘뮤즈신’에 사로잡혀 광란 상태에서 시를 쓴다. 이렇듯 제 정신이 아닌 자들은 모두 ‘공화국’에서 추방시켜야 한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 주장은 당시 예술가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샀다. 이성을 기반으로 한 철학과 모방을 기반으로 한 예술 사이에 불화가 생긴 것이다. 이때부터 철학과 예술은 서로 경쟁관계가 되었다. 그 두 분야는 서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며 발전하였다. 예술은 이성적 진리를 담을 수는 없는가? 인간은 이성적으로만 살 수 있는가?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알아챈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은, 인간의 삶이 고통과 슬픔에 직면했을 때 냉철한 이성으로 고통의 원인을 살펴서 알아낸 뒤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성적 사고가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까? 고통과 슬픔에 직면했을 때 비극을 보며 차라리 실컷 울어버리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가슴이 뻥 뚫리는 카타르시스가 온다. 그동안 쌓여 있던 우울감, 불안감, 긴장감으로 가득 찬 마음은 소나기 온 뒤 푸른 하늘처럼 가볍고 맑아진다. 즉,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詩學)>에서 비극이 관객에 미치는 중요 작용으로 카타르시스의 예를 들었다. 스승이 미처 몰랐던 사실을 제자가 알아낸 것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모방론’을 옹호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이 모방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모방을 통해서 새로운 것들을 알아간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본보기 같은 이야기다. 

sgp@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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