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이승만 시대(18) 미국적 취득 거부...특공대 조직, 무기원조 요청
[연재]이승만 시대(18) 미국적 취득 거부...특공대 조직, 무기원조 요청
  • 이주영(李柱郢)교수
  • 승인 2020.03.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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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주영(李柱郢): 
건국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공동대표.
1942 평북 용천 출생. 인천중-제물포고 졸업
서울대-서강대-하와이대 사학과 수학
프린스턴대-콜럼비아대 사학과에서 연구
역사학회-한국 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건국대 사학과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주요저서: 미국의 좌파와 우파/ 미국사/ 미국현대사의 흐름/ 빼앗긴 서양문명의 역사/ 빼앗긴 우리역사 되찾기/ 한국현대사 이해/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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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미국적을 갖지 않고 무국적자로 남다

계속된 좌절에 이승만은 실망했다. 그나마 반가웠던 것은 미 법무부에 냈던 청원이 1942년 2월에 받아들여진 사실이었다. 당시 미국정부는 일본과 전쟁중이었으므로 미국 안의 일본인들을 적국(敵國) 국민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신민이었기 때문에 일본인과 꼭같이 적국민 대우를 받았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한국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시정해 달라는 청원서를 냈는 데, 미 법무부로부터 받아들여진 것이다. 미국 정부가 한국인을 일본인과 다르게 취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앞으로 한국 독립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일제시대 해외에 있던 대부분의 주요 독립운동가들은 편의상 중국 국적이나 미국 국적을 가졌다. 

김구나 안창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끝까지 미국 국적을 갖지 않고 무국적자(無國籍者) 망명객 신분으로 살았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 밖으로 나갈 때마다 미 국무부에서 귀찮은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때마다 그는 미국 국적 취득을 권유받았다. 그러나 그는 한국이 곧 독립될 것이므로 필요없다는 농반진반으로 거절하곤 했다. 

그러나 무국적 망명객 신분으로 미국 정부와 교섭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정부를 상대할 때마다 미국인들을 앞에 내세웠다.  예를 들면, 1942년 3월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호소문을 보낼 때는 미국인으로 구성된 한미협회(Korean-American Council)를 내세웠다. 

1942년 1월에 창립된 한미협회의 주도 인물은 워싱턴 폰들리 감리교회 목사이며 국회 상원 원목인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 목사, 그리고 캐나다 대사를 지낸 제임스 크롬웰이었다. 1943년 8월에는  미국인 기독교도들로 기독교인친한회(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했다. 

기독교인친한회의  주도 인물은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가서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을 운영했던 O.R. 애비슨, 그리고 아메리칸 대학 총장인 폴 더글러스였다.  한미협의회는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아무런 회신도 없었다.

미국인 후원자들을 모아 한인자유대회를 개최

그러나 이승만은 낙심하지 않았다. 1942년의 3 · 1 절을 계기로 워싱턴 백악관 근처의 라파예트 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를 열었다. 회의는 2월 27일부터 3일간 열렸다. 

이번에는 노선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한인들을 망라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서재필은 물론 그에게 껄끄럽게 생각되던 김용중과 국민회 인사들도 참석케 했다. 미국 전역에서 100 여명의 한인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한미협회(Korean-American Council)의 크름웰, 스태거스, 윌리엄스, 더글라스, 헐버트, 존 커피 등의 많은 미국인 후원자들은 물론 워싱터의 유명 정객들이 참석해 주었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미국이 한국인을 돕는 길은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임을 역설했다. 그리고 6월13일에는 ‘미국의 소리’(VOA) 단파방송을 통해 고국 동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한 방송은 7월까지 몇 차례 더 계속되었다.  

그 방송을 듣고 전파했다는 이유로 한반도에서는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죽고 옥 살이를 하기는 했지만, 독립 희망에 대한 소식이 고국의 식자층으로 퍼져나가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승만을 가까이서 도운 미국인들

문제는 일부 재미교포들이 이승만은 한인들을 대표할만큼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폄하하고 그 비방을 미 국무부 관리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을 후원하는 미국인들에게는 그가 한국인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미 국무부에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스태거즈 변호사는 한국에 있다가 1940~41년에 일본에 의해 추방된 미국인 선교사들을 일일이 찾아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리고는 한국인을 대표할 인물이 누구인지를 묻는 설문지를 돌렸다. 대부분의 회신은 이승만을 꼽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스태거스는 국무부의 극동 담당 스탠리 혼벡 박사를 찾아가 회신 묶음을 내밀고 당장 검토해 줄 것을 요구했다. 

혼벡은 마지못해 한 시간 동안 그 문서를 살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정도면 이승만의 대표성이 증명되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국무부의 태도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해방이 가까오면서 이승만은 몇 명의 미국인 후원자를 더 얻게 되었는 데, 대표적인 경우가 로버트 올리버(Robert Oliver) 박사였다. 그는 오리건 주립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제2차대전 중에 워싱턴에서 군수품 조달 부서에 일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는 시라큐스 대학과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승만이 1942년 8월하순에 올리버 박사와 만나게 된 것은 에드워드 정킨 목사의 소개 때문이었다. 정킨 목사는 한국에 파견되었던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이었다.  이승만의 또 다른 후원자는 1943년 2월경에 알게 된 미 육군 전략국(OSS) 소속의 프레스턴 굿펠로우 대령이었다. 

굿펠로우는 일본과의 전쟁에 한국인들을 활용하라는 이승만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래서 그는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한 한인 청년들을 비밀리에 특수부대로 훈련시켜 일본이나 한국에 침투시켜 첩보활동과 파괴활동을 벌이게 할 ‘냅코(NAPKO)’ 계획을 세웠다.  이승만은 장석윤을 비롯해 12명의 한국인 청년들을 선발했다. 그리고 1942년 12월4일부터 훈련을 시작하여 성공적으로 마첬다. 

그렇지만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함으로써 전선에 투입될 기회는 갖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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