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기
박인기

즉답(卽答)은 어떤 물음을 받고 그 자리에서 즉각 대답하는 것이다. 즉답은 얼핏 생각하면 듣기가 아닌 말하기의 영역 같지만, 그렇지 않다. 즉답이야말로 듣기의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반응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속인(俗人)들이 자기 역량은 돌아보지 않고 즉답에 나서려 하는 것은, 즉답에 능하여 재주가 뛰어나 보이고 싶은, 그런 지적 허영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유혹에 빠지면 즉답은 실패한다. 아니, 그 인격도 실패한다. 즉답은 오랜 세월 세상 이치와 인간 행태에 깊은 통찰을 쌓아 득도의 경지에 이른 현인들에게서나 기대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런 분들도 즉답을 직설(直說)로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비유나 상징으로 말하거나, 널찍한 해석의 여지를 두고 우의적(寓意的)으로 말한다. 그래서 막상 즉답은 들었지만, 구체적 솔루션은 더 고민하게 된다. 점을 치고서 받는 점괘도 이와 유사하다.

공개된 청문회(Hearing) 등에서 간혹 일문일답 진행을 원할 때, 화끈하고 솔직한 즉답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걸지만, 그럴수록 청문의 성과를 제대로 얻기보다는 정파 간의 말꼬리 싸움과 감정적 언쟁으로 흐르기가 쉽다. ‘즉답을 요구하는 쪽이나, 즉답으로 상대를 압도하려는 쪽이나 모두 전투적 성급함을 은폐하여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백이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그대는 어이해 푸른 산에 사는가(問余何事棲碧山)”하는 물음에 소이부답(笑而不答, 그냥 웃을 뿐 대답하지 아니함)’으로 응하는 장면은, 듣기의 태도로 더할 수 없이 훌륭하고 지혜롭다. 그 어떤 재치 충만의 즉답도 이 장면을 넘어설 수 없다. 그 어떤 단호한 카리스마와 권위도 소이부답을 넘볼 수가 없다.

새삼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말라(논어 학이편)”는 공자의 말씀이나,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화내기도 더디 하라.(야고보서 119)”는 성서의 말씀이 다시 되돌아 보인다. 직설과 막말로 다투어 즉답에 뛰어드는 정치꾼들도 다시 돌아 보인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