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남공작 70년사]
1960년대, 지도연락공작조 통한 북한의 혁신정당 창당 공작

1961년 5.16 혁명 직후 북한 동조 혐의로 폐간된 민족일보 대표 조용수와 관련자들이 혁명재판정에서 재판을 받는 모습. 조용수는 간첩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고 그 해 12월 사형이 집행됐다.
1961년 5.16 혁명 직후 북한 동조 혐의로 폐간된 민족일보 대표 조용수와 관련자들이 혁명재판정에서 재판을 받는 모습. 조용수는 간첩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고 그 해 12월 사형이 집행됐다.

북한 노동당 공작지도부는 합법적 혁신정당 창당 및 통일전선 공작을 최백근 등 일부 간첩들에게만 맡겨놓지 않았다. 정치적 안목이 높고 조직지도 능력을 가진 공작조를 별도로 파견해 혁신정당 창당 공작을 측면에서 지원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도연락공작조를 한국 현지에 파견해 혁신정당 창당을 조종하려고 했던‘지도연락공작’이다.

당시 지도연락공작조로 파견되었던 대표적인 인물은 남로당 간부였던 백상윤과 홍현기다. 부산 출신의 백상윤은 8.15 이전부터 공산주의운동에 관여했다. 8.15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경남도당 조직부장과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공산당이 남로당으로 바뀐 다음에는 중앙조직의 노동부장까지 했던 고위급 인물이다.

그러나 남로당 활동 과정에 박헌영ㆍ이승엽 등 간부들을 비판하다 그들의 눈 밖에 나 노동조합 간부로 밀려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로당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수사기관에 체포되기도 했다. 6.25 전쟁 시기에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서대문형무소를 탈옥해 이승엽이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서울시 인민위원회에 들어가 노동부장을 지냈다.

6.25 전쟁 와중에 박헌영ㆍ이승엽 사건이 터지자 그들로부터 배척당했던 백상윤은 박헌영ㆍ이승엽의 과거 행동을 낱낱이 폭로 비판하는 등 견결히 투쟁함으로써 노동당 지도부의 신임을 얻기도 하였다. 그런 관계로 6.25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북한에서 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러던 중 4.19 직후 지도연락공작원으로 선발된 것이다.

서울 출신의 홍현기도 8.15 이전부터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했고 8.15이후에는 백상윤처럼 조선공산당 서울시당 간부로 활동했다. 남로당 시절에는 충청남도 당위원장까지 역임한 거물급 공산주의자였다.

홍현기는 남로당 시절 지도부의 좌경모험주의 노선을 비판하다 하급조직으로 밀려났지만 열심히 활동하였고 그로 인해 수사기관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6.25 전쟁이 터진 뒤 북한군의 서울 점령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탈옥한 홍현기는 6.25전쟁 시기 노동당 서울시당 간부부장을 역임했다. 또 1950년 10월 인민유격대 제1지대 연대장, 지대장으로 활동하면서 소백산 지대에서 군과 주민들에 대한 약탈과 기습, 파괴행위 등을 감행하다 토벌을 피해 북한으로 들어갔다.

북한에 들어가서는 소련 고급당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와 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60년 8월 지도연락공작원으로 선발되어 백상윤과 같이 지도연락공작조에 편성된 것이다. 이처럼 백상윤과 홍현기는 남로당 활동 경력도 직책도 비슷한 데가 많았다.

이들은 특별교육을 통해 지도연락공작원으로서의 임무와 역할, 그리고 임무수행을 위한 지도방법 등을 숙지하는 한편 신변보호를 위한 무술훈련도 받았다. 그리고 1명의 무전통신 전담 연락원을 더 들여와 3인 공작조를 구성하는 등 남파공작을 위한 준비를 빈틈없이 했다.

당시 이들이 수행해야 할 공작임무는 이미 국내에 침투해 합법정당 창당 및 통일전선 형성 공작을 추진하고 있던 남파공작원들을 접선한 다음 이들의 활동을 지도하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기존에 침투해 합법정당 창당 및 통일전선 공작을 진행하고 있던 간첩들이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실무적으로 지도하는 것이었다.

남파공작 준비를 마친 지도연락공작조는 1961년 4월 한강을 따라 수중으로 김포지역에 침투한 다음 서울로 잠입했다. 그 후 각자 친인척을 찾아가 그들의 비호를 받아 현지에 안착하는데 성공했다.

서울에 안착한 백상윤ㆍ홍현기 지도연락공작조는 우선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공작임무를 부여받고 암약하고 있던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 통일혁신당 부위원장이며 자주평화통일촉진협의회 부위원장이던 이영옥과 현지에서 접선해 이들의 활동상황을 파악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5.16이후 혁신정당이 불법화되어 활동이 금지되고 설상가상으로 최백근ㆍ이영옥 등이 곧바로 체포되었다. 뒤이어 또 다른 접선 및 지도대상이었던 이만희까지 줄줄이 체포되면서 더 이상 남파될 당시 공작지도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임무수행은 고사하고 당장 자신들의 신변 위험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북한 공작지도부는 이들을 복귀시키기로 결정하고 지령을 내려 1961년 7월 중순 기존에 침투할 때 이용했던 한강 수중침투 루트를 통해 북한으로 복귀시켰다. 복귀 후 백상윤은 중앙당 문화부 부부장으로, 홍현기는 공작원 양성기관인 순안정치대학(695군부대, 후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 부학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서 1960년 4.19 직후 조성된 한국내부의 혼란기를 이용해 전개했던 북한의 혁신정당 창당 공작은 결국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통일전선 구축 공작 역시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조용수, 북 지령따라 '민족일보' 창간

1960년 4.19를 전후한 시기에 전개된 북한의 대남공작에 대해 얘기할 때 ‘민족일보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민족일보 사건은 한마디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용수가 4.19 직후의 국내 혼란상황을 이용해 새로운 민족지 성격의 신문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그것을 거점으로 하여 합법정당 창당 공작과 통일전선 형성 공작을 추진하다가 1961년 5.16혁명 이후 신문사가 폐간되고 사장인 조용수가 체포 처형된 사건이다.

1930년 4월 24일 경남 진양(현재의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조용수는 서울에서 좌익진영 언론계에 몸을 담고 활동하던 중 수사당국의 지명수배를 받게 되자 1951년 9월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피신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용수는 도쿄에 살면서 계속해서 언론인으로 활동하였고 전후 복잡한 틈을 타 국내에도 여러 번 다녀간 바 있다.

1950년대 말 조용수는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대남간첩 이영근과 수시로 접촉했다. 이영근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비서출신으로서 간첩혐의로 기소되어 공판계류 중 1958년 1월 보석 중에 일본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와 함께 조용수는 동포사회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북한 대남공작지도부의 지령에 따라 일본 및 한국에 대한 각종 대남공작을 지도하고 있던 김병식과도 정치적으로 연계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가 나중에 한국에 들어와 민족일보를 창간한 것도 결국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대남공작을 담당하고 있던 김병식과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용수와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던 김병식으로 말하면 원래 국내에서 언론활동을 했던 경험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던 인물이다. 1919년 2월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김병식은 일본 동북대학을 졸업하고 국내에서 활동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인물이다. 조용수를 만날 당시에는 일본 내 친북조직이자 공작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약칭 조총련) 산하 조선통신사 사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1966년에는 조총련 부의장에 임명되었고 1970년에는 제1부의장을 역임하는 등 일찍부터 조총련의 중요 직책에서 활약하면서 대남ㆍ대일 공작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북한의 신임을 받으면서 활동하던 김병식은 당시 조총련의장이었던 한덕수와의 불화 등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1972년 10월 북한에 들어가 눌러앉게 되었다.

김병식은 북한에 들어가서는 노동당 대남공작부서에서 일하다가 1993년 7월 사회민주당 위원장으로 발탁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부주석에 전격 임명되어 활동하던 중 1999년 7월 사망했다. 그는 핵심 노동당원이었으며 김일성의 충실한 혁명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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