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이승만 시대(19) "소련이 한반도 먹는다" 경고...카이로 회담 '밀약' 규명촉구
[연재]이승만 시대(19) "소련이 한반도 먹는다" 경고...카이로 회담 '밀약' 규명촉구
  • 이주영(李柱郢)교수
  • 승인 2020.0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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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주영(李柱郢): 
건국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공동대표.
1942 평북 용천 출생. 인천중-제물포고 졸업
서울대-서강대-하와이대 사학과 수학
프린스턴대-콜럼비아대 사학과에서 연구
역사학회-한국 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건국대 사학과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주요저서: 미국의 좌파와 우파/ 미국사/ 미국현대사의 흐름/ 빼앗긴 서양문명의 역사/ 빼앗긴 우리역사 되찾기/ 한국현대사 이해/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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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소련의 한반도 개입을 우려하다

인을 “싸우지 않은 민족”으로 분류한 데 대해 분노

미 국무부를 상대로한 이승만의 끈질긴 설득 작업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1942년 11월 말 미 국무부는  중국 외무부차관 빅터 후(胡世澤)를 통해 임시정부가 목표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문서로 알려 달라는 간접적인 요청을 받았다.

이승만은 즉각 답변서를 보냈다. 한국인들이 싸우고 있는 목표는 1940년에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처칠이 발표한 ‘대서양헌장’에서 제시된 자유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썼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해방이 되면 자유선거(free election)를 통해 국가를 세울 것이며, 그렇게 세워진 한국인의 국가는 극동에서 침략국을 견제할 완충국의 역할을 해서 동양 평화 유지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이와 꼭같은 내용의 서한을 코델 헐 국무장관에게도 보냈다.

이 서한에서는 “만일 지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승인을 받지 못하면 전쟁이 끝났을 때 한반도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는 불행한 결과가 올 것이다.”라는 내용을 추가했다. 그러나 이 서한에 대해서도 헐 국무장관은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 66세의 이승만.(워싱턴에서)
▲ 66세의 이승만.(워싱턴에서)

그러다가 한참 뒤에 코델 헐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승만의 서한에 대해 간접적으로 답변을 보내왔다. 즉, “어느 약소민족이든지 자기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은 민족’은 미국의 지원을 기대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인들은 독립을 위해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지원을 기대할 자격 없다는 것을 의미함이 분명했다. 그에 대해 이승만은 실망하고 분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는 완전히 외면당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미 국무부 차관을 물러난 섬너 웰스가 뜻밖에도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글을 신문에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는 미국· 영국· 중국의 3개국이 "한국인들의 노예상태를 유념”하여 “적당한 절차에 따라” 독립을 허용할 것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카이로 선언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최측근인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 사진)가 작성한 원고를 영국 대표가 약간 수정함으로써 나온 것이었다. 해리 홉킨스는 독실한 감리교도인 사회사업가 출신이었기 미국인 목사들과 많은 교분을 가지고 있던 이승만을 통해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컸다.

카이로 선언의 “적당한 절차”에 대한 불안감

한국인들은 카이로 선언을 크게 반겼다. 이승만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절차에 따라"라는 문구가 그의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독립 시기를 무한정 늦추기 위한 구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미국을 비롯한 주요 강대국들은 한국을 완전히 독립시키기 전에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信託統治)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계획은 나중에 출간된 코델 헐 국무장관의 회고록에서 나타났다. 그는 그 책에서 1943년 3월 27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한국에 대해서는 중국과 미국 이외의 한, 두 나라가 더 참여하는 신탁통치가 어떻겠느냐고 자기에게 제안했다고 썼다.

이승만이 볼 때,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면 한국은 독립이 늦어질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좌우합작 연립정부가 들어서게 되어 결국은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될 것이 분명했다.

당시 이승만은 그러한 강대국들의 계획을 알 수 없었지만,  의심할 여지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것의 의도를 의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 국무부에 서한을 보내 카이로 선언의 '적당한 절차'라는 문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히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도 미국정부로부터는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소련군이 한반도를 점령할까 걱정

제2차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져감에 따라, 한국독립에 대한 이승만의 희망도 커져갔지만, 그와 동시에 한반도가 소련군에 의해 점령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커져갔다.

이승만이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야심이 어떤 것인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19세기말 청년기에 소련의 전신인 러시아의 팽창주의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러시아는 함흥,원산,부산과 같은 얼지 않는 항구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목재· 석탄· 철· 금과 같은 천연자원을 얻기 위해 조선 정부를 압박하곤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젊은 이승만은 독립협회 동지들과 함께 그것을 막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지금의 소련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보다 더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영토 확장의 야심에 덧붙여, 새로이 공산주의 혁명 확산의 야심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과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는 공산주의 체제를 동경하고 소련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거의 대부분이 해방된 한국은 공산주의 국가가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받아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대 분위기가 그러했기 때문에 김구가 이끄는 중경의 임시정부마저도 1942년에 좌우합작(左右合作) 체제로 바뀌었다. 중국 정부의 압력으로 우파 한독당의 김구 세력이 좌파 민족혁명당의 김규식-김원봉 세력을 받아 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김구가 공산주의자들을 포용하는 것에 대해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못마땅해 했다.

여기에 덧붙여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끌던 미국의 민주당 정권도 대체로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서민을 위한다는 ‘뉴딜 정책’이 바로 루즈벨트 행정부의 좌경화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국무부 안에 좌파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나중에 소련 간첩으로 드러난 알저 히스였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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