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22) 민노총의 탄생과 5.18 특별법 제정

87년 노동자 대투쟁때 생긴 노조들, 한국노총 가입 거부 새 연대조직 모색
한국통신파업 강경 대응 문민정부, 교계 반발·잇단 대형사고로 개혁 후퇴
민주노총, 출범 후 사회개혁 투쟁 주력...권영길 위원장 대통령 후보 내기도
재야·학생운동 5.18 쟁점화로 全·盧 구속...성공한 쿠데타 처벌 선례 남겨

94~95년 통일운동을 둘러싼 재야와 학생운동의 분열은 범민련이 아닌 새로운 통일운동체(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 설립 논쟁과 김일성 ‘조문파동’에 이어 ‘북한동포돕기운동’에서의 이견으로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새통체를 준비하는 측에서는 "남과 북 해외 3자 연대에 의한 범민련에 의해 통일운동이 진행되면 종북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고, 대중적인 통일운동은 불가능하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었다. 반면 범민련과 한총련 등 종북 성향의 통일운동 진영은 독자적 통일운동 모색은 "3자 연대를 거부하는 반통일적 행동"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런데, 94년 범민족대회를 앞두고 북한 범민련이 "‘범’을 뺀 ‘민족대회’를 반대한다"는 문건을 팩스로 보내오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또, 종북 성향의 통일운동 진영이 ‘안기부 프락치’라고 문익환 목사를 비난하고, 그 스트레스로 심근경색을 일으켜 문익환 목사가 숨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편, 북한의 대홍수로 식량난에 빠진 북한에서 2-300만 명이 굶어 죽고, 식량을 찾아 국경을 넘는 일이 빈번해졌다. 탈북자들에 의해 북한 내부의 참상이 드러나며 ‘북한동포돕기운동’이 급속히 번졌다. 재야의 총본산인 전국연합을 비롯해 경실련(우리민족서로돕기)과 기독교 월드비전 등이 ‘북한동포돕기운동’에 뛰어들었다.

1990년 전노협 창립대회에서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에 종북 성향의 범민련과 한총련은 ‘북한동포돕기운동’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북한동포돕기운동’으로 북한의 참상이 보도되며 북한의 체면이 손상되고 있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갈등은 범민련과 한총련이 8.15 대회에서 ‘민족공동행사’가 열리는 보라매공원에서 이탈하여 서울대 범민족대회장으로 이동하면서 표출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범민족대회가 열리는 서울대에 헬기까지 띄우고 최루액을 뿌려댐으로써 통일운동의 분열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즉, 종북세력에 대해선 강경하게 탄압하고 온건세력은 끌어들이려는 이중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96년 연세대 사태까지 이어지게 된다.

민주노총의 탄생

하지만, 통일운동에서의 극심한 분열과 달리 민생과 반정부 투쟁에서 재야, 학생운동은 단일대오를 유지했다. 95년에 생산직 중심의 전노협(위원장 단병호)과 사무직 중심의 업종회의(의장 권열길)가 통합되어 민주노총이 만들어졌다.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조합들이 만들어지고, 한국통신 파업을 계기로 민주노총이 결성된 것이다.

87년 6월 민주화운동에 이어 7, 8, 9월의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수출주도형 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저임금을 받던 노동자들이 친정부적 한국노총체제에 반기를 들고 민주화와 민주노조 건설을 목표로 파업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87년 한해 만 노조 수가 2,675개에서 4,103개로 늘어났고, 조직률도 12.3%에서 13.8%로 증가하였다.

이때 탄생한 노동조합들은 한국노총 가입을 거부하고 새로운 노동조합의 연대조직 건설을 모색하였다. 90년 1월 제조업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14개 지역협의체와 2개 업종별 조직, 600여 개 노동조합의 20여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 위원장 단병호)’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사무 전문직 업종의 14개 연맹, 586개 노동조합, 200,197명 조합원을 거느린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약칭 업종회의, 의장 권영길)’가 결성되었다. 이 두 조직은 1991년 10월 국제노동기구(ILO) 기본조약 비준과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ILO 공대위)를 구성하여 공동 활동을 전개하였다.

93년 6월에는 전노협, 업종회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대노협)가 주축이 되어 1,048개 노동조합, 420,409명 조합원으로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약칭, 전노대)’를 결성하였고, 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 창립대의원대회를 열어 민주노총(총 862개 노조, 42만 조합원)을 출범시키고, 권영길과 권용목을 위원장과 사무총장으로 선출하였다.

95년 민주노총이 탄생하는데 기여한 것은 한국통신파업이었다. 한국통신은 94년 5월부터 공기업 임금 가이드라인 철폐와 함께 통신시장 개방 반대, 대기업 위주의 통신산업 민영화 중지 등을 내걸어 정부와의 갈등했다. 이에 사측이 유덕상 노조위원장 등 간부 64명을 고소 고발하며 중징계 방침을 결정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5월 19일, IPI 한국위원회 위원장과 이사진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한국통신 노조가 불법행위를 계속하며 정보통신 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국가전복의 저의가 있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단순한 노사분규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태"로 규정했다.

이에 사측은 64명의 노조 간부를 중징계하였으며, 경찰은 핵심간부 20명을 검거하고 일부를 구속하였다. 노조는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농성에 들어가고, 조합원들은 준법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경찰은 조계사와 명동성당에 경찰을 투입하여 노조 간부를 연행하고 구속하였다.

하지만,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경찰이 진입한 것을 두고 천주교와 불교계가 크게 반발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 정부의 개혁은 크게 후퇴하였고,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등 각종 사고로 지지도가 폭락하였다. 결국, 6월에 치러진 제1차 지방선거에서 신한국당은 대패하고 말았다.

민주노총은 출범 이후 전국적인 임금, 단체협약 갱신 투쟁과 함께 정경유착 근절과 노동조합 경영참가, 사회복지제도 개선, 세제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개혁 투쟁에 주력하였다. 96년에는 국제노동기구 기준의 자주적 단결권, 쟁의권 확보와 공무원, 교사의 노동3권 확보, 복수노조금지 조항, 정치활동 금지조항 삭제, 변형근로제, 근로자파견제 저지, 주 40시간 노동제를 위한 노동법개정 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국회에서 개악된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되었다. 이에 민주노총은 3,422개 노조, 연인원 380만여 명이 참여하는 총파업투쟁을 벌였다. 이에 미국 등 22개국 노동자의 연대와 지지를 끌어냈다. 97년에는 북한동포돕기 조합원 모금,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사정위원회 참가하고,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1993년5월18일 연세대학교에서 전두환-노태우 체포 결사대 출정식에 참석한 결사대가 깃발을 흔들고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0년 이후 민주노총은 경직된 고임금 고용구조를 유지하고, 고용세습을 시도하는 등 개혁세력이기보다는 기득권 집단의 길을 걷고 있다. 민주노동당 결성 이후 지나친 정치 개입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고, 주사파에 의해 조직이 장악됨으로써 다수 조합원의 외면과 종북 집단의 주도권 행사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5.18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 노태우 구속

95년은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묶이게 된 WTO가 출범한 해다. 그리고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4월, 101명 사망),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6월, 502명 사망, 6명 실종), 북한 대홍수, 여수 앞바다에서 유조선인 씨프린스호 침몰(12월) 등, 여러 가지 재안이 일어난 해다.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화 원년’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돌파했지만, 대형 재난사고와 해양생태계 오염으로 국민적 신뢰도가 추락했다. 김종필은 김영삼 대통령과 갈등을 빚고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고, 김대중도 영국에서 돌아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시점에서 5.18에 대한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에 재야 학생운동은 거세게 반발했다. 그들은 ‘5.18특별법’ 제정과 전두환 노태우 구속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섰다.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15주기를 맞아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하라는 시위가 벌어졌다.

6월 지방선거가 끝난 뒤 5.18 문제는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김영삼 정부의 초기 입장은 "5.18에 대해 진상규명이 진행되었기에 평가는 역사에 맡기자"는 입장이었다. 7월 19일 검찰에서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요지로 ‘공소권 없음’이 발표되었다.

전국연합을 비롯한 재야와 한총련은 전두환, 노태우의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8월 16일에 장충공원에서 2만 명이 모인 가운데, 국민대회를 진행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경찰을 대회장에 진입시키고 강경진압을 시도했다. 9월에 들어서도 한총련은 신한국당사를 점거하는 등 동맹휴업과 총궐기 투쟁을 전개했다.

10월 들어 박계동 의원에 의해 4천억에 달하는 노태우 비자금 내역을 폭로했다. 이에 언론매체가 노태우 비자금 이야기를 대서특필하는 가운데, 11월 3일 재야와 학생운동은 총궐기 투쟁을 전개되었다. 총궐기 투쟁은 신림사거리, 신촌, 안암로터리 등의 대학가에서 집회가 열리는 종묘공원을 향해 인도로 걸어오며 거리에서 선전전을 펼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인도를 통해 걸어오며 선전전을 펼치는 학생들에게 시민들도 호응했다. 4천억에 달하는 노태우의 비자금에 대한 분노가 컸기 때문이다. 반면, 시위를 막는 경찰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한 시위대열도 아니고, 인도에서 자연스럽게 걸어가는 학생대열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전국연합과 학생운동의 집회와 시위에서 여론을 살피던 김영삼 정부는 "‘5.18특별법’을 제정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4천억 비자금 사건으로 떠들썩한 노태우를 구속하였다. 이에 한총련에서는 구속되지 않은 전두환을 체포하겠다며 연세대에 집결하고 철야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가 계속되자, 12월 2일 전두환은 집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갔다. 이에 검찰은 전두환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구속하였다. 곧이어 국회에서는 ‘5.18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성공한 쿠테타’도 처벌되는 선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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