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이승만시대(21) 미-소 결속에 '소련 위성국' 우려...흥사단-한길수등이 모략
[연재]이승만시대(21) 미-소 결속에 '소련 위성국' 우려...흥사단-한길수등이 모략
  • 이주영(李柱郢) 교수
  • 승인 2020.04.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자 이주영(李柱郢): 
건국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공동대표.
1942 평북 용천 출생. 인천중-제물포고 졸업
서울대-서강대-하와이대 사학과 수학
프린스턴대-콜럼비아대 사학과에서 연구
역사학회-한국 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건국대 사학과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주요저서: 미국의 좌파와 우파/ 미국사/ 미국현대사의 흐름/ 빼앗긴 서양문명의 역사/ 빼앗긴 우리역사 되찾기/ 한국현대사 이해/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과의 면담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의 이중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로서는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1943년 여름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의 이름으로 한반도 안에서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보고서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출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이승만이 보내온 보고서를 송자문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물었다. 그때 송자문은 미국을 방문중이었다.

그러자 송자문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분열이 너무 심해 아무 힘도 쓰지 못할 것이라고 답변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승인을 막는 결정적인 발언을 했다.    

1945년 3월 9일 이승만은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Anna Eleanor Roosevelt) 여사를 만날 기회를 얻었다. 이승만은 대통령 부인에게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군사 원조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보좌관들의 잘못된 보고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대통령에게 시정을 건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승만을 만난 다음 그녀는 그의 독립 운동과 인격을 높이 평가하는 글을 신문에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도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정부의 대외정책을 바꿀 수는 없었다.

유엔 창립 총회에서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마지막 호소

독일의 항복을 한 달 앞 둔 1945년 4월, 연합국은 전후의 세계 평화를 유지할  기구로서 유엔을 창설하기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승만은 그 회의에 옵서버 자격으로라도 참석하여 한국 독립에 대한 연합국의 확실한 보장을 얻려고 했다.

미국의 한인교포들도 그 회의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이념과 노선에 관계없이 모두가 협조하려 했다. 그 때문에 2개 대표단이 통합된 하나의 한국대표단이 구성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유엔 창립 총회가 열리는 샌프란시스코의 모리스 호텔에 한국대표단 본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나서 총회 사무총장인 알저 히스에게 한국 대표단의 옵서버 자격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거부당하고 말았다.

유엔 창립 총회장에 나타난 이승만이 회의장 안팎에서 느꼈던 분위기는 미국이 소련을 특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독일이 항복하는 즉시 미국이 소련을 일본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 확실했다.

이승만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근거는 많았다. 그것은 영국의 처칠 수상이 발칸 반도에 미군과 영국군을 상륙시킬 것을 끈질기게 주장했는데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끝까지 거부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처칠이 발칸 반도 상륙을 고집했던 것은 그 지역의 나찌 독일군을 몰아내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지역에 대한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루스벨트가 처칠의 제안을  거부했다는 것은 발칸 반도를 소련에게 넘겨 줄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증거는 프랭클린 루스즈벨트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게 압력을 넣어 모택동의 공산당과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하도록 강요한 했던 사실이었다.

중국의 통치자인 장개석에게 독자적인 군대를 가진 모택동의 반란세력과 손을 잡으라는 것은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공산화를 받아들이라는 요구였다.

이와 같은 압력은 모두 소련을 특별배려하려는 데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서도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해 줄 것으로 이승만은 확신했다.

따라서 한국인에게 독립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결국은 동유럽 국가들처럼 소련의 위성국으로 떨어질 것이 확실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러한 불행한 사태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으려 했다.

그래서 그는 임시정부 승인 요청 서한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렇게 해주면 나중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연합국 감시 밑의 ‘자유선거’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로부터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승만을 반공주의자라고 괴롭힌 한인들

그러한 이승만에게 닥친 보다 더 큰 문제는 미국교포들 가운데도 좌우합작(左右合作) 지지자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들 한국인 좌우합작주의자들은 소련의 협조를 얻어서라도 독립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독립된 나라가 공산화가 되고 안 되는 것은 그 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친소-친공의 태도는 미 국무부 안에 있는 친소-친공적인 관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특별정치국장 알저 히스, 극동정치국장 존 카터 빈센트를 위시하여 핼도어 핸슨, 존 스튜아트 서비스, 올리버 에드워드 클라브 등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한국문제 담당관인 조지 맥퀸(George McCune) 박사도 있었다. 그는 평양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인물로서, 서북지방 출신의 안창호 계열의 흥사단 인사들과 가까웠다.

이와 같은 한인 좌우합작파들 때문에 이승만은 미 국무부로부터 더욱 더 무시를 당했다. 

이들 좌경한 일부 교포들은 이승만이 전체 한국인의 대변자가 아니라고 계속 비난했는데, 바로 그 사실을 미 국무부가 악용했던 것이다. 미 정부는 한국인들의 분열을 임시정부 승인 거부에 활용했던 것이다. 

그처럼 이승만에게 적대적이었던 인물들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민회, 흥사단, 교포신문인 <신한민보> 관계자들 속에 많았다. 

그 가운데서 가장 격렬하게 이승만을 비판했던 좌파 인물이 한길수(韓吉洙)였다.

그는 호놀루루 일본 영사관에서 정기적으로 돈을 받았던 것으로 밝혀진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거기서 얻은 정보를 미 국무부 하급 관리들에게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

한길수는 김규식 계통의 조선민족혁명당, 중한동맹의 좌우합작 노선을 따랐기 때문에 미 국무부의 정책과도 맞았다.

한길수는 미 국무부 관리들에게 이승만이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보잘것 없는 인물이라고 폄하했다. 그리고 중경 임시정부는 몇 안 되는 늙은이들로 이루어진 사설단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헐뜯었다.

그보다 더 이승만에게 위협적이었던 교포단체는 1941년 4월에 조직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였다. 그것은 9개의 한인단체들이 호놀루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해 결성한 한인사회 최대의 단체였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도 참여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그 기구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중경 임시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이승만에게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하라고 요구하면서 갈등이 일어났다.

외교를 담당할 인원을 늘이라는 요구였다. 이승만은 그것을 인사 문제에 대한 간섭으로 생각하고 거부했다. 그러므로 1943년 12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인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회를 탈퇴하게 되었다.

그러한 이승만과 대한인동지회의 행동을 중경의 임시정부가 지지하고 나서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임시정부에 대한 보복으로 재정지원을 끊었다.

jayooilbo@jayoo.co.kr

더 자유일보 일시 후원

“이 기사가 마음에 들면 후원해주세요”

  • ※ 자유결제는 최대 49만원까지 가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