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우석 한국방위산업학회장에 들어 본 'K-방산' 역사·위상

이승만 '병기공창' 첫발...박정희 '국방과학硏' 현대화 기틀
끊임없는 훈련으로 '명품 무기' 탄생...美·러 능가 세계 1위

채우석 한국방위산업학회장은 자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K-방산이 우리 5000년 역사에서 최고의 호기를 만났다"고 말했다. /김석구 기자
채우석 한국방위산업학회장은 자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K-방산이 우리 5000년 역사에서 최고의 호기를 만났다"고 말했다. /김석구 기자

"5000년 역사에서 지금 K-방산처럼 최고의 호기를 만난 적이 없을 거다. 대한민국 방산의 위상은 동북아를 둘러싼 세계 4강의 견제 속에서 70여 년에 걸친 사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K-방산의 위상이 중동을 넘어 유럽에서 빛나고 있다. 폴란드 정부의 K-2전차·K-9자주포· FA-50·천무다연장로켓 도입은 그동안 잠재돼있던 한국 방산의 힘을 확인시켜줬다. 이에 노르웨이 또한 K-2전차 도입을 서두르면서 중동 국가들도 K-2전차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K-방산의 연이은 호재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느끼는 요즘, 한국 방위산업 발전의 역사를 보다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채우석(72) 한국방위산업학회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본지는 채 회장을 만나기 위해 11월 17일, 전쟁기념관에 위치한 한국방위산업학회를 찾았다.

채 회장은 예비역 육군 준장으로 한국 방위산업 발전을 이끌어온 주역이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28기로 임관 후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위스콘신대에서 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방부 획득개발국 획득과장·획득기획과장, 국방부 조달본부(현 방위사업청) 외자(外資)부장을 역임했다. 2001년 예편 후 국방부 조달본부 차장으로 임용돼 2005년까지 재임했다. 이후 한국방위산업학회장, 방산선진화포럼 회장, 통일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발전을 위한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방산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인가.

"한국 방산 역사는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1948년 8월 15일 육군특별부대 산하에 ‘육군병기공창’을 설립하도록 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출발했다. 당시 ‘육군병기공창‘은 우리나라 유일한 병기공창이었는데, 여기서 주로 수류탄, 지뢰, 등 소형 병기와 탄약·부품 및 병기 부속품의 제작생산, 정비 및 재생 업무를 수행했다. 이후 국방부병기행정본부 산하 과학기술연구소가 1954년 7월 14일 ‘국방부과학연구소’로 격상되었고 여기서 군용 식량, 피복, 유·무기 재료, 원자력 이용, 로켓 등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13건의 발명특허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기술을 축적해 1957년 7월 27일에는 인천 고천동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3단 로켓 발사에 성공하게 됐다."

-당시 방산 기술로 어떤 무기들을 만들었나.

"당시 육군, 해군, 공군은 각자 무기기술연구소를 두고 무기 개발에 착수했고, 육군은 기존의 국방부과학연구소가 수행하던 연구를 발전시켰다. 해군은 6.25전쟁 이전에 ‘제1충무공정’을 건조했으며, 잠수함용 축전지, 함정용 디젤기관, 함정용 특수탄, 함정기계, 함정재료, 함정용 전기전자 등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1951년 7월에는 수상항공기 ‘통해호(統海號)와 8월에는 두 번째 수상함인 ’제2충무공정‘을 건조하며 가시적 성과를 만들기도 했다."

-걸음마 단계에서 현대적 방산으로 거듭난 것은 언제쯤인가.

"1970년대 북한은 제2의 6·25를 일으키기 위해 끊임없이 도발해왔다. 이에 대한민국은 국방산업에 모든 힘을 집중하며 250만 예비군을 무장시키기 위한 수류탄, 크레모아, 소총 등 8종류의 무기를 40일 만에 개발하는 ‘번개사업’을 진행하게 됐다. 우리 군은 창군 초기부터 무기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당시 국가재정 여건, 과학기술 수준, 산업시설, 기술인력 등의 여건이 미흡하여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 힘들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를 만들어 각 군의 무기 연구소들을 하나로 흡수통합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국방 산업 현대화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자주 국방을 위한 방산 투자에 어떤 노력을 했나.

"1970년 주한미군 1사단이 철수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무기개발을 수행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전차와 장갑차를 만들기 위해서 자동차산업에 투자를 했고, 미사일을 만들기 위해 전자산업에 투자했으며, 함정을 만들기 위해 조선산업에 투자한 것이다. 또 탄약과 포탄을 만들기 위해 화학산업에 투자를 했고, 철강을 공급하기 위해서 제철산업에 투자했다. 이렇게 1970년대에 투자한 것이 1980년대 국제적으로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에 힘입어 6.25 이후 폐허가 됐던 대한민국이 선진국가로 전 세계인들에게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방산이 유럽에서 선전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냉전 이후 독일과 유럽은 평화가 왔다면서 군비축소를 하고 군대를 거의 해체시키다시피 했다. 평상시에 대규모 훈련을 하지 않으니 방위산업 생산라인을 유지할 수가 없었고, 기존 무기들도 성능개량이 잘 되지 않다보니 명성에 비해서 잔고장이 많이 발생하는 등 엉망이었다. 그러다보니 유럽산 무기들이 소량 생산되어 가격이 비싸고 유지 보수 비용도 비싸지며 약점으로 작용했다. 또 군사훈련을 거의 하지 않다 보니 유럽산 무기들의 성능이 카탈로그에 나와 있는 것 보다 한참 떨어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철저히 준비돼있다. 항상 북한이라는 적을 상대해야 하므로 만반의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국산 무기가 유럽산과 성능 면에서 어떤 차이가 있나.

"단적인 예로 독일산 전차와 자주포가 국산 K-2전차와 K-9자주포와 함께 설상에서 기동테스트를 하다가 엔진이 꺼져 한국산 장비들에 참패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를 보더라도 우리 군의 끊임없는 훈련과 문제점에 대한 방산 기업들의 대처가 오늘날의 명품 무기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 군은 장비를 극한까지 운영하기 때문에 유럽산 장비들을 우리 군이 사용하다가 고장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유럽산 무기들의 내구성이 한국군의 훈련 강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번 수리온 헬기 추락사고도 유럽산 부품이 문제를 일으켜서 사고가 난 것이다. 한국 장비들은 여름에는 영상 40도, 겨울에는 영하 30도, 여름에는 폭우, 겨울에는 폭설과 중국발 미세먼지 등 정말 가혹한 환경에서도 견디게 만들어진다. 그러니 한국산 무기들의 성능이 좋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민간 분야의 기술들이 폭발적으로 발달하면서 첨단 민간기술이 군사기술로 많이 유입되다 보니 한국산 군사장비들의 수준이 높아지는 등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 대한민국 방위산업 수준과 국방력 어느 수준이라고 보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방위산업 역량은 세계 2위 수준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유럽산 무기는 성능이 엉망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러시아 장비들도 반도체, 각종 센서들을 해외에서 수입하다 보니 최신 전차, 장갑차, 전투기들을 개발해 놓고도 대량 생산을 못 하고 있는 사실들이 드러났다. 결국 군사용 장비들도 반도체, 전자장비, 센서들이 대거 탑재되는데 4차 산업혁명시대의 첨단기술을 한국이 대부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핵무기를 제외하고 재래식 무기의 성능향상 부분은 미국 다음인 세계 2위 수준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대량생산 분야에서는 미국, 러시아 등을 모두 능가하는 세계 1위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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