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이승만시대(22) 얄타회담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 밀약 폭로..
[연재]이승만시대(22) 얄타회담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 밀약 폭로..
  • 이주영(李柱郢)교수
  • 승인 2020.0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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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대로 소련군 재빨리 북한 점령

저자 이주영(李柱郢): 
건국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공동대표.
1942 평북 용천 출생. 인천중-제물포고 졸업
서울대-서강대-하와이대 사학과 수학
프린스턴대-콜럼비아대 사학과에서 연구
역사학회-한국 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건국대 사학과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주요저서: 미국의 좌파와 우파/ 미국사/ 미국현대사의 흐름/ 빼앗긴 서양문명의 역사/ 빼앗긴 우리역사 되찾기/ 한국현대사 이해/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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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창립총회에서 분열된 모습을 보이다

그 결과로 워싱턴에는 교포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하여  별도의 조직들을 가지고 따로 따로 미국 정부를 상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는 중경 임시정부의 공식 외교기관으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1944년 6월부터 워싱턴 사무실을 열고 외교활동을 시작했다.

한길수도 1938년부터 중한민중동맹단의 외교대표와 민족혁명당 북미총지부의 외교대표로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45년 4월에 유엔 창설을 위해 샌프랜시스코 회의가 열린다는 발표가 있었을 때, 여러 한인 단체들이 별도로 참가하게 될 형편이었다.

실제로 유엔창립총회 현장에는 김구의 중경 임시정부가 임명한 이승만의 임시정부대표단, 그리고 김원용,김호,전경무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임명한 이정근의 해외한족민족대표단이 모두 나타났기 때문이다.

얄타 밀약설을 터뜨려 세계를 놀라게 하다

이승만은 모리스 호텔에 본부를 설치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한국의 독립이었으므로 그것을 목표로 단결하자고 호소했다.

모두가 찬성해 이승만은 통합한국위원회의 이름으로 회의 사무총장인 알저 히스에게 한국대표단의 옵서버 자격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부당했다.

그때 한국인들에게 미 국무부의 좌우합작(左右合作) 노선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해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이 나타났다. 그는 한국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회의가 한창 진행중인 5월 22일에 한인 지도자들을 위한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항의 표시로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송자문의 의도에 대해 불신감을 가져온 터였다.

그러자 ‘좌우합작’ 노선에 찬성하는 국민회 인사들이 통합 한국위원회로부터 탈퇴하고, 따로 본부를 차렸다.

그에 따라 한국인 대표단은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표단, 김원용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 한길수의 중한민중동맹단 대표단의 세 갈래로 분열되었다.

미국정부와의 관계에서 볼 때는 좌우합작을 거부하는 이승만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승만에게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이 1945년 5월 14일에 폭탄선언으로 발표한 것이 이른바 얄타 밀약설이었다.

기자 회견에서 이승만은 유엔창립총회가 한국인 대표단의 참석을 거부한 것은 얄타 회담에서 한반도를 소련에게 넘기기로 비밀협약(秘密協約)을 맺었기 때문이라는 폭탄적인 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한 어느 소련인 망명객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유엔총회 회의장은 이승만의 선언으로 발칵 뒤집혔다.

미 국무부는 즉각 부인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런데도 이승만이 계속 비난하자, 백악관이 직접 나서서 부인했다.

이승만 발언의 파장은 영국에까지 밀려 하원에서 의원들로부터 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답변에서 처칠 수상은 얄타에서 비밀협약은 없었지만, 많은 문제들 가운데서 “대체적인 양해”가 이루어진 것들은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바로 그 “대체적인 양해”가 이루어진 문제들 가운데 소련의 한반도 점령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미국정부로부터의 반박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자기의 의심이 옳다고 믿었다.

그러나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파견한 해외한족대표단은 이승만이 한국인의 대외적 신망을 추락시켰다고 비난했다.

우려했던 대로 소련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다

이승만의 우려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저절로 확인되었다. 1945년 8월 12일부터 소련군이 북한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함에 따라, 미국과 소련 사이에 한반도의 일부를 소련에게 넘긴다는 밀약(密約)이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승만이 일본의 항복 소식을 라디오로 들은 것은 미국 시간으로 8월 14일 밤11시 워싱턴의 집에서 였다. 기쁜 마음에 교포들이 그의 집으로 달려왔다.

그들에게 이승만은 소련의 행동에 대해 걱정했다. 미국이 일을 잘못 처리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싸우게 되어 피를 흘리게 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이승만이 우려했던 대로 치밀한 계획에 따라 빠른 속도로 김일성 정권을 세워 나갔다.  그리고는 시베리아에서 훈련시킨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내세워 공산화(共産化)를 추진했다. 그러한 경험은 소련이 제2차대전 말기에 동유럽 국가들을 점령하면서 얻은 것이었다.

소련군은 재빨리 남쪽으로 내려와 38도선에 경계초소와 진지를 만들므로써 북한과 남한의 교류를 막았다.  남북의  분단을 굳히려는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미군은 소련군 보다 거의 한 달이나 늦은 1945년 9월 7일에야 인천항을 통해 남한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사회주의자인 여운형은 공산주의자인 박헌영과 함께 재빨리 좌우합작의 성격을 띤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것은 그들이 서류상으로 급조한 정부를 미군으로부터 기정사실로 인정받으려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주한미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그것의 승인을 거부했다. 그리고는 미 군정만이 남한 지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선포했다. 

미국, 반소주의자 이승만 귀국 방해

이승만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한 나머지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려 했다. 그러나 국무부의 방해로 쉽지가 않았다.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처리해야 할 미국으로서는 반공주의자이며 반소주의자인 이승만이 나타나면 골치가 아플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승만이 미국 정부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올리버 박사는 그에게 미국정부의 좌우합작 정책에 따를 것을 간곡히 권유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승만은 정부 수립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좌우합작은 공산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조직이 없는 우파가 조직이 강한 좌파와 손을 잡았을 때, 우파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이오와의 시골로 쫓겨가 닭을 키우며 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좌우합작에는 절대로 찬성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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