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주동식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한다. 설마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편향된 지식과 인식체계에 고착된 사람의 선입견이 얼마나 질기고 교정이 어려운지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는 책을 딱 한 권만 읽은 것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다수이고 사회의 주류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관한 인식은 책 한 권만 읽은 수준이 아니라, 아예 외눈박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우리나라의 세대별 정치 의식을 보면 40대가 가장 좌파 성향이 강하다. 평상시 여론조사나 대선 또는 총선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표심이 그걸 입증한다. 우리가 흔히 386이라고 부르는 50대보다 훨씬 더 강성 좌파 성향을 드러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50대는 80년대에 민주화투쟁의 몸살을 직접 겪었던 세대다. 5·18에 가슴이 뜨거워졌고 민주·민족·민중을 푯대 삼아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었던 세대다.

이들 가운데 짱돌 한번 던져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세대 전체가 일종의 동지의식을 공유한다. 심지어 직접 투쟁에 나서지 않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던 사람들조차, 일종의 부채감으로 뒤늦게 또래들의 세대의식에 동참하곤 한다.

40대는 어떤가. 1987년에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고 난 뒤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세대들이다. 이들은 80년대 학번들이 공유했던 군사 파쇼의 물리력과 거기에서 연유하는 절실한 공포를 직접 겪은 적이 없다. 이들에게는 80년대 전체가 일종의 전설이자 가상현실(virtual reality)로 다가온다. 즉, 일종의 놀이공원에 가깝다.

놀이공원에 가면 공포체험관이 있다. 온갖 괴물과 유령들이 관람객에게 공포를 선물한다. 관람객들 가운데 그 괴물과 유령이 진짜라고, 그 공포가 현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건 가짜야. 무서워할 필요 없다니까"라고 소리쳐 말하는 사람도 없다.

지금 40대의 정치의식이 50대보다 더 강성 좌파 성향인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들은 독재체제를 직접 체험한 적도 없고 민주화투쟁의 주역이 되어본 적도 없다. 이들이 했다는 민주화투쟁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투쟁이다. 명분은 민주화투쟁이라고 했지만, 사실 투쟁 당사자들도 본인들이 진짜 민주화투쟁을 한다고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포체험관의 관람객들이 괴물과 유령을 진짜라고 믿지 않는 것처럼.

비슷한 사례를 일본 식민지의 경험에도 대입해 볼 수 있다. 지금 80대라 해도 식민지 시기에는 코흘리개 어린애였다.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요즘 어르신들 가운데는 마치 일제 통치를 직접 겪은 것처럼 일본에 대해 분노와 증오를 드러내는 이들이 많다.

필자가 어렸을 때 뵌 어르신 중에는 일제 통치를 직접 몸으로 겪으신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이 전하는 식민통치의 경험에는 특징이 있었다. 일방적인 증오나 칭찬이 아니었다. 일제의 문제도 지적했지만 좋은 점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평가해줬다. 그분들의 경험이 실체적인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50대들은 전두환 정권과 열심히 싸운 세대지만, 일방적으로 그 시대를 폄하하는 경향은 적다. 90년대 학번보다는 편향이 덜하다. 책으로만 그 시대를 간접 체험한 게 아니고 직접 몸으로 부딪혔기 때문일 것이다. 간접체험은 일방적이고 극단화되기 쉽다.

우리 사회의 근·현대사 지식은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처럼 독단적이고 폭력적이다. 그걸 보여주는 것이 40대의 정치의식이다. 독단적인 지식은 결코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고 독이 될 뿐이다. 이 일방적인 역사 인식을 끊어내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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