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리 인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은행들의 '이자 장사' 성적표로 통하는 예대금리차(대출 금리와 예금 금리의 차이)도 8년 만에 최대치까지 벌어졌다. 사진은 27일 서울의 한 은행에 붙어있는 대출 및 예금 관련 안내 현수막. /연합
최근 금리 인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은행들의 '이자 장사' 성적표로 통하는 예대금리차(대출 금리와 예금 금리의 차이)도 8년 만에 최대치까지 벌어졌다. 사진은 27일 서울의 한 은행에 붙어있는 대출 및 예금 관련 안내 현수막. /연합

한국은행이 지난 24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지만 주요 시중은행들은 아직까지 예금금리를 올리지 않고 있다. 지난달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했을 때 당일 곧바로 예금금리를 올린 것과 대조적이다.

시중은행들이 예금금리 인상을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은행 예금으로의 시중자금 쏠림현상을 우려하고 있는 금융당국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으로 관측되고 있다. 실제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25일 ‘금융시장 현황 점검회의’를 열고 "금융권의 과도한 자금확보 경쟁은 금융시장 안정에 교란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업권간·업권내 과당경쟁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실제 시중자금의 쏠림현상은 금융시장의 안정을 저해한다. 시중자금이 은행 예금으로 쏠리면 대출금리도 올라 차주들의 부담이 커진다. 특히 은행과 경쟁하는 제2금융권도 예금금리를 올려야 해 재무 건전성이 급속도로 악화할 수 있다. 이 같은 분위기 탓에 이달 중순 연 5.3%까지 올랐던 시중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순식간에 5% 밑으로 내려앉았다.

예금금리의 인상 속도가 늦춰지면 대출금리 오름세도 더뎌진다. 문제는 금융당국이 시중자금을 빨아들이는 은행채 발행 자제를 요구한 상태에서 예금금리 인상까지 봉쇄하면 은행의 자금조달 루트가 막힌다는 것이다.

27일 은행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은행채 일별 순발행 실적은 지난달 21일 KB국민은행의 1400억원이 마지막이다. 한 달 닷새 가까이 5대 시중은행은 만기가 도래한 은행채를 갚기만 했을 뿐 새로 은행채를 발행해 자금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심지어 하나은행의 경우 지난 9월 26일 1300억원 이후 두 달째 은행채 순발행 실적이 없다.

이는 자금시장 경색의 ‘불똥’이 은행으로 튄 결과다. 대표적 우량 채권인 은행채가 채권 발행시장을 장악하면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일반 회사채에 대한 수요가 줄고, 금리는 뛰며, 발행 유찰과 자금 경색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게 금융당국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은행채로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은행이 의존할 수 있는 주요 자금조달원은 예적금뿐이다. 지난 8월과 10월 빅스텝을 포함해 한국은행이 잇따라 기준금리를 올린 영향도 있지만 최근 은행들이 앞다퉈 예금금리를 5% 안팎까지 높인 것도 결국은 자금조달 경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예금금리 인상을 통한 자금 유치조차 여의치 않게 됐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준금리 인상 이후에도 시중은행의 예금상품 금리 인상 움직임이 없는 것은 예금 금리 인상 경쟁에 대한 금융당국의 잇단 경고성 메시지를 고려한 정무적 판단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은행채 발행과 예금금리 인상이 모두 막혀 유동성 확보가 어려운 가운데 은행의 기업대출만 계속 늘어나면서 은행의 유동성 관련 지표도 불안한 상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10월 말 은행권의 기업대출 잔액은 1169조2000억원으로 한 달 새 13조7000억원이나 불어났다. 10월 기준으로 지난 2009년 6월 통계가 시작된 이후 역대 최대 증가폭이다.

은행권의 기업대출 잔액이 급증한 것은 회사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들이 계속 은행 대출 창구로 몰려들고, 금융당국도 금융지주와 은행들에 대출 등의 기업 지원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은행권의 경우 12월에 만기가 도래하는 은행채가 많은데, 차환을 위한 은행채 발행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이 가운데 대출은 계속 늘어나 11월 중순까지 거의 100% 수준이었던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이 최근 90%대 후반으로 내려왔고, 12월에는 90%대 중반까지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유동성커버리지비율은 향후 1개월간 순현금 유출액에 대한 유동성자산의 비율을 말한다.

정부는 현재의 자금시장 경색이 단기에 끝나는 것을 가정하고 은행에 양립할 수 없는 과도한 주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은행권의 시각이다. 은행채 발행은 물론 예적금 확보를 위한 수신금리 인상도 자제하라면서 대출 등 각종 금융지원만 요구하는 것은 뜨거운 아이스커피를 주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변수 탓에 자금시장 경색이 다시 심화될 경우 은행 유동성도 고갈돼 더는 방파제 역할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위기론이 대두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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