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23) 연세대 사태

범민련 남측본부와 베를린에 있는 범청학련 본부 지시에 의존
1996년 8월 13일부터 20일까지 연세대서 불법폭력시위 벌여
경찰, 5848명 연행·462명 구속, 국민들은 과격 투쟁에 비판적

5.18 특별법 제정 투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95년 ‘민족공동행사’ 장을 이탈하여 범민족대회가 열리는 서울대로 간 한총련은 전국연합을 비롯한 재야 민간통일운동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한총련은 범민련 남측본부와 베를린에 있는 범청학련 본부의 지시에 의존했다.

한총련 내부에서 한총련의 종북적 성향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95년 말 대학가 총학생회 선거에서 한총련 주류의 총학생회는 4개가 줄어들었고, 온건파인 ‘사람사랑학생회’ 계열은 1개가 늘었으며, PD계열의 대장정, 21세기 진보연합 등의 총학생회는 1개가 늘었다. 또, 비운동권 계열의 총학생회도 2개가 늘어났다.

1996년 8월 범민족대회와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남측행사를 연세대에서 개최하려던 학생들이 경찰의 봉쇄에 막히자 신촌 연세대 사회과학관과 종합관 옥상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다 경찰특공대에 진압당해 연행을 기다리고 있다. /김석구 기자
1996년 8월 범민족대회와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남측행사를 연세대에서 개최하려던 학생들이 경찰의 봉쇄에 막히자 신촌 연세대 사회과학관과 종합관 옥상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다 경찰특공대에 진압당해 연행을 기다리고 있다. /김석구 기자

이러한 움직임을 한총련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전북대에서 열린 4기 한총련 출범식에 전대협과 한청협, 전국연합 등 재야 선배들을 초청하여 충고를 듣는 모습을 취했다. 행사도 풍물놀이 민속장터 등으로 축제처럼 치렀고, 구호는 5.18 관련자 전원 처벌과 대선자금 공개, 교육재정 확보 등 온건한 것이었다.

온건한 출범식과 달리 내부적으로는 치열한 노선투쟁이 전개되었다. 종북계열의 강경파는 정명기 의장을 배출한 남총련과 서울 북동부지역 대학, 그리고 경기동부그룹이 자리 잡고 있던 용성총련(용인성남수원)이 주축이었다. 또 조통위와 정책실, 그리고 대학신문 기자들 연합체인 전대기련은 종북 주사파들로 채워졌다.

한총련, 세계청년학생축전 서울개최 선언

치열한 노선투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한총련은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과 범민족대회를 강행하려고 했다. 류세홍(전남대 치의예 4), 도종화(연세대 4)를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는 평양 대표를 영접한다는 명목으로 평양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종북 주사파가 주도하는 범민족대회를 묵과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도 범민련 남측본부와 한총련은 "정부의 태도가 의례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94년이나 95년처럼 범민족대회장을 봉쇄하고 최루탄 공세를 펼치겠지만, 8월 15일이 지나면 지역으로 돌아가도록 할 것이라고 여겼다.

경찰은 범민족대회가 열리기로 한 연세대를 봉쇄했다. 경찰의 봉쇄를 뚫고 연세대에 집결한 통일선봉대 등 2만여 명을 제외하고 지역에서 올라온 남총련 등은 범민족대회가 예정된 연세대로 진입하지 못하고 신촌 일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다가 다른 대학으로 분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 같으면 대회장을 옮겨 범민족대회를 치렀다. 94년과 95년 서울대의 범민족대회가 그렇게 치러졌다. 그런데, 이번엔 범민련이나 한총련 지도부도 연세대를 고수했다. 8월 13일 통일대축전 전야제를 개최했고, 8월 14일 오전 통신교류를 통해 범청학련 회의를 열었다.

국가보안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남북학생연석회의’가 열리자, 경찰은 연세대로 병력을 투입했다. 경찰은 전경 51개 중대 6천여 명에 헬기 11대를 동원하여 정문과 동문, 북문을 통해 연석회의가 열리는 노천극장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한총련은 통일선봉대를 중심으로 화염병과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연세대 교정으로 진입한 전경들이 곳곳에서 학생들에게 포위당한 채 집단구타를 당하고 무장해제가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신촌 일대에서는 연세대로 진입하려는 1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앞, 뒤에서 공격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소방차와 포크레인 등 중장비를 동원한 경찰은 겨우 노천극장과 대강당, 학생회관을 수색한 뒤에 철수해야 했다.

한총련의 반격과 신촌 일대 시위에 일격을 당한 경찰이 상부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경찰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일대의 전경들을 차출해서 진압병력을 5만여 명으로 증원했다. 15일 새벽, 경찰의 피로도가 극심하고, 추가 병력이 증원되는 사이 연세대 봉쇄가 일시적으로 풀렸다.

전국연합과 한총련의 온건 진영은 빨리 해산하고 연세대를 빠져나갈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범민련과 한총련 지도부는 주변 대학가에 분산된 대학생들을 연세대로 집결시키는 지시를 내렸다. 14일 일시적인 승리에 취해 범민족대회를 사수하자는 것이었다.

한총련 지도부, 분산된 학생들 연세대로 집결시켜

8월 15일 오전 10시 범민족대회가 열리자, 병력을 증원한 경찰은 10시 30분경부터 2차 진입작전을 펼쳤다. 한총련의 쇠파이프와 화염병에 곤욕을 치렀던 경찰들은 한총련에 대한 적개심으로 들끓었다. 최루액 3천 리터와 헬기 12대 불도저 등 중장비를 동원하여 정문을 뜯어내고 진입을 시작하였다.

11시 45분에 서문으로도 진입한 경찰은 정문과 서문의 운동장에서 한총련과 대치하며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8월 15일 야간에 경찰은 서치라이트와 조명탄을 쏘며 3차 진입을 시도하였다. 경찰의 강경한 모습에 당황한 한총련은 모든 일정의 종료를 선포하고 16일 거리행사로 취소했다. 아울러 범민족대회 참가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김광일 대통령비서실장 주재로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폭력행위자 전원 구속" 방침을 재확인했다. 또, 김우석 내무부 장관은 "한총련이 또 불법폭력시위를 벌일 것"이라며, "한총련 관련 수배자들을 전부 검거하여 한총련을 와해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앞으로 이적행위자와 불법폭력 시위자는 전원 검거해 의법조치 하겠다"고 말했다.

8월 16일 19시부터 경찰은 전경 110개 중대 1만 3천 명으로 외곽을 봉쇄 후, 50개 중대 6천여 명의 전경과 경찰특공대 36명, 조명차 4대, 조명탄 4천여 발, 그물 60개, 고가사다리 2개 등의 병력과 장비로 4차 진입을 시도하여 학생회관과 서문 운동장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외신 등 언론을 의식하여 야간 진압은 포기한 채, 다시 퇴각하였다.

한총련 지도부는 화공약품과 실험실 기자재 등으로 진입이 어려운 이과대에 모여 있었다. 학생회관 앞에 있던 학생들은 인문관과 종합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경찰은 17일 오전 11시 30분부터 헬기 7대로 최루액을 뿌리며 전경 100여 개 중대 1만 2천 명이 5차 진입작전을 펼쳤다. 재야와 시민단체가 학생들에게 음식물과 약품 및 여성용품들의 전달을 요구했으나, 경찰에 의해 묵살되었다.

1996년 8월 연세대 종합관 등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농성하던 학생들이 경찰의 진압으로 연행되고 있다. /김석구 기자
1996년 8월 연세대 종합관 등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농성하던 학생들이 경찰의 진압으로 연행되고 있다. /김석구 기자

최병국 대검 공안부장은 "한총련의 친북, 이적 활동이 용인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며, "한총련 간부들에 대해 전원 사법처리하고 한총련을 와해시키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어 경찰은 한총련과 지역총련 사무실 등 8개 대학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한총련을 아예 없애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같은 날 안병영 교육부장관과 연세대, 학생이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연세대 측의 제안을 학생들이 거부했다. 8월 19일에는 해양 헬기까지 등장했다. 프로펠러 바람으로 종합관과 이과대 옥상에 있던 학생들을 위협하며, 대량의 최루액을 계속해서 쏟아부었다. 8월 20일 새벽 5시 50분부터 종합관에 전경 16개 중대 2천여 명을 투입하여 진입하자, 종합관은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연세대 종합관 불타고, 김종희 일경 보도블록 맞아 숨져

이 과정에서 종합관에 진입하던 김종희 일경이 학생들이 던진 보도 블럭에 맞아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화재로 검은 연기에 휩싸인 종합관에서 학생들은 저항을 포기하였고, 7시 40분에 진압이 종료되었다. 이과대에 있던 5천여 명의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쌓고 화염병, 돌, 의자 등을 던지며 격렬히 저항했고, 한총련 기자회견을 틈타 뒷산을 타고 달아났다.

8월 20일까지 연세대 사태로 총 5,848명을 연행되었으며, 462명이 구속되고 3,341명을 불구속 입건되었고, 373명이 즉심에 넘겨졌다. 구속자 462명 중 진압 작전 이전에 구속된 사람이 93명, 진압 당시 연행자 중 구속된 사람이 369명이었다.

96년 연세대 사태는 86년 건국대 사태와 닮았다. 후반기에 접어든 정권이 국정을 장악하기 위해 강경한 방침을 세웠고,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학생들이 건물로 밀려 들어간 것이 비슷했다. 86년 건대 사태는 개헌 투쟁을 앞두고 있었고, 96년 연세대 사태는 김대중, 김종필에 맞서 정권 재창출에 나서던 시기였다.

하지만, 학생운동의 대응방식은 달랐다. 경찰의 급습을 당했던 건대 사태와 달리 연세대 사태에서 학생들은 격렬한 저항으로 맞섰다. 건대 사태 후 학생운동은 뼈저린 반성을 통해 직선제 개헌 등 대중노선을 정립했지만, 연세대 사태 후 한총련은 책임을 정부 탓으로 돌리며,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국민은 한총련의 과격 투쟁에 비판적이었다.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경찰에 저항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생중계되고 진압경찰이 사망하고, 실명자가 속출하는 과격 시위를 이해하지 못했다. MBC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80%가 한총련 시위를 지지하지 않았고, 72.5%가 단호한 대처를 지지했다(8월 18일 자).

국민과 대학생들에게 외면받는 한총련

더구나 개인주의적인 X세대는 한총련의 투쟁을 용납하지 않았다. 폐쇄적인 학생운동 조직과 활동은 학생들로부터 배척받았다. 11월 치러진 연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비운동권 후보가 전 단과대에서 1위를 하며 과반수로 당선되었다. 또 전국의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절대 과반을 차지했던 NL계열이 48%로 크게 쇠퇴했다.

당국의 검거와 수배에 몰린 한총련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97년 남총련과 한총련 출범식에서 일반인을 경찰 프락치로 오인하여 감금 구타하여 사망토록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종권 씨 감금 구타 살인사건(97년 5월 27일 전남대)’, ‘이석 씨 감금 구타 살인사건(97년 6월 4일 한양대)’이 그것이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