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이승만시대(23) 미, 이승만 귀국 막아..."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호소
[연재]이승만시대(23) 미, 이승만 귀국 막아..."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호소
  • 이주영(李柱郢)교수
  • 승인 2020.0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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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합작하면 공산화된다

저자 이주영(李柱郢): 
건국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공동대표.
1942 평북 용천 출생. 인천중-제물포고 졸업
서울대-서강대-하와이대 사학과 수학
프린스턴대-콜럼비아대 사학과에서 연구
역사학회-한국 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건국대 사학과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주요저서: 미국의 좌파와 우파/ 미국사/ 미국현대사의 흐름/ 빼앗긴 서양문명의 역사/ 빼앗긴 우리역사 되찾기/ 한국현대사 이해/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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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부 좌파들에 의한 귀국 방해

이승만이 미 국무부로부터 얼마나 따돌림을 당했는가는 귀국 때 겪은 어려움에서 잘 알 수 있다.

일본 항복의 소식을 듣는 순간에 이승만은 귀국하기 위해 미국 여권을 신청했다. 그러나 한반도는 군사 작전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여행 허가증을 얻어야 했다.

이승만은 여행 허가증을 얻으려 했고, 미 국방부는 그를 위해 여행 허가증을 맥아더 사령부에 전보로 요청했다.

그때 미 국무장관실로부터 국무부 여권과에 이승만에게 준 여권을 취소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여권에 적혀 있는 '주미한국고등판무관'이란 직위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여권을 반납하고 그 직위를 삭제한 새 여권을 받았다.

그러자 다시 국무부로부터 이승만을 위한 수송편을 제공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설사 제공하게 된다 하더라도 일본의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국방부에 대해 맥아더 장군의 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쳐달라고 요청했다.

그러한 이승만의 요청에 대해 국방부는 국무부의 특별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국무부 여권과에 특별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자 여권과는 더 이상 그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일이 복잡하게 꼬인 것을 보면 국무부 안에 분명히 이승만의 귀국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 국무부도 할 말은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한반도 문제를 놓고 소련과 협상해야 할 판에, 반공적이고 반소적인 이승만을 빨리 한국으로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 1945년 10월, 하지 중장과 아놀드 장군의 안내로 중앙청에서 귀국기자회견을 하는 이승만. 
▲ 1945년 10월, 하지 중장과 아놀드 장군의 안내로 중앙청에서 귀국기자회견을 하는 이승만. 화동들이 축하 화환을 전달하기 위해 연단에 서있다.
 

33년만의 초라한 귀국

그러므로 이승만은 해방이 된지 40일이 지난 1945년 10월 5일에야 미국을 떠날 수 있었다.

그는 뉴욕의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하여 하와이, 괌을 거처 해방된지 두 달만인 10월 16일에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때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같이 오지 못했다. 그녀는 3개월이나 더 늦은  1946년 1월에 가서야 시애틀에서 일본 가는 군 수송선을 타게 될 것이었다.

이승만의 귀국은 비밀로 했다. 개인 자격이었기 때문에 단 한 명의 수행원도 없었다.

그 때문에 김포 비행장에는 한 명의 환영객도 없이 몇 명의 미군들만 나왔을 뿐이었다. 미군 군용기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만 탄다는 규정에 따라 이승만도 미 군복 차림이었다. 

그러나 그의 도착을 알리는 신문 호외가 나오면서 국민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도착 다음 날 아침, 이승만이 묵은 조선호텔 앞은 환호하는 군중으로 넘쳤다.

환영 인사들 가운데는 좌익들도 있었다. 명성을 지닌 이승만이 자기들이 서류상으로 급조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직을 맡아 주기를 희망하는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그 후 수많은 정파로부터 당수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이승만은 모두 거절했다. 그는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으려 했다. 그 자신도 정당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날 오전 이승만은 하지 중장과 아놀드 장군의 안내로 중앙청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다. 외국인 기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는 영어와 한국어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10월 24일부터는 조선호텔을 떠나 숙소를 기업가 장 씨 소유의 돈암장으로 옮겼다.

▲ 귀국 후 돈암장에 머물 때의 이승만.(1945. 11) 왼편 맨 끝에 이승만의 비서 윤치영이 서있고, 이 박사의 오른편에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 여사가 서있다. 나머지는 미군정 측에서 뽑아 보낸 경비원들.
▲ 귀국 후 돈암장에 머물 때의 이승만.(1945. 11) 왼편 맨 끝에 이승만의 비서 윤치영이 서있고, 이 박사의 오른편에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 여사가 서있다. 나머지는 미군정 측에서 뽑아 보낸 경비원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에게 가장 시급했던 것은 정부를 세우는 일이었다.

국제 감각이 뛰어났던 이승만이 볼 때, 통일된 독립국가의 건설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그는 강대국들이 한국인들에게 즉각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위험이 크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미국과 소련이 한국인의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일이 급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단결이 시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가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국민의 뜻을 모으기 위한 국민운동을 벌이려고 했다. 한국인들이 분열되었다는 것을 세계에 보이면 강대국들이 독립을 늦추기 위한 구실로 이용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0월 23일에 65개 정당과 단체의 대표들을 모아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했다. 그것은 자기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단체들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조직이 없이 개인자격으로 참여했다. 이승만은 그것을 정식 정부가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인의 의사를 미군정청에 전달하기 위한 민의기구로 생각했다.

무엇 보다도 한국인의 단결된 모습을 강대국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일단 좌익들도 끌어 들이려고 했다.

그 때문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기는 공산주의에 반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정책 면에서 채택할 점이 많다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자기는 공산주의자들 가운데서 혁명을 고집하는 극렬 파괴분자들만을 거부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공산당의 박헌영, 인민당의 여운형과 접촉했다. 그에 따라 10월 31일 박헌영이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하게 되었다. 

좌익들은 협조의 선결 조건으로 친일파 숙청을 요구했다. 그에 대해 이승만은 나라가 세워진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응수했다.

결국 이승만은 좌익들과의 타협이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1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직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공산당은 11월 23일 그를 비난하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탈퇴했다. 뒤이어 여운형의 인민당도 그렇게 했다. 

그 때문에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우파들만으로 구성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이름으로 11월 4일에 미 · 영 · 소 · 중 4대 연합국과 미국 국민에게 한국인의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하는 ‘우리의 결의문’을 보냈다. 그것은 자유선거를 통한 조속한 정부 수립을 요망하는 것이었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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