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정의 길 따라...] 경남 산청

정겨운 옛 돌담 굽이굽이...한방 의료·힐링 체험 관광지 인기
1000년 역사 남사예담촌엔 등록문화재 지정된 돌담·토담길

운치 가득한 남사예담촌 담장길.
운치 가득한 남사예담촌 담장길.

한국에서 가장 ‘건강한’ 여행지를 꼽으라면 아마 경남 산청이 아닐까. 이곳에는 명의 허준의 의서 《동의보감》을 주제로 꾸민 한방 테마파크 동의보감촌이 있다. 정겨운 옛 돌담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남사예담촌은 가족과 함께 손을 잡고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곳

지리산 천왕봉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산청은 지명 그대로 산 좋고 물 맑은 곳이다. 경호강, 덕천강, 지리산 양단수 등 맑은 물이 있고 지리산, 왕산, 황매산 등 좋은 산 또한 자리 잡고 있다. 산청은 1천 여종의 야생 약초가 자라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신의 류의태와 의성 허준이 의술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리라. 산청의 우수한 약초를 알리고 산청을 한의학의 성지로 만들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동의보감촌. 지난 2013년 문을 열었으며, 한방 의료와 힐링 체험 관광지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동의보감촌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은 귀감석이다. 거북이를 닮은 커다란 돌이 있는데, 그 무게가 127톤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기가 센 지역 중 한 곳이라는데, 사람들이 기를 받고 소원을 빌기 위해 찾는다. 한국관광공사 이참 전 사장이 이곳에 다녀간 뒤 사장으로 추천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복석정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다. ‘복을 담는 그릇’이라는 뜻. 이 바위에 동전을 세우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동의보감촌의 거북 상.
동의보감촌의 거북 상.

한의학박물관은 입구부터 관람객의 시선을 모은다.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동상이 있는데 높이 4.7m, 너비 13.5m, 길이 20m에 달한다. 안에 들어서면 《동의보감》과 한의학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옛날 한의원 풍경을 재현해놓은 곳도 있다. 두뇌와 키가 성장하는 쑥쑥 한방법, S 라인과 V 라인을 만드는 날씬 한방법, 100세까지 무병하는 장수 한방법 등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한의학을 만나는 코너도 유익하다.

정겨운 돌담길 따라 옛 마을 나들이

동의보감촌을 나와 본격적인 산청 여행에 나서보자. 먼저 갈 곳은 남사예담촌. 돌담길이 예쁜 한옥마을이다. 박씨와 이씨, 정씨, 최씨, 하씨, 강씨 등이 집성촌을 이룬 마을로, 1,000년을 훌쩍 넘어가는 마을의 역사에 걸맞게 뛰어난 인물도 많이 배출했다. 일찍이 고려시대에 윤씨 집안에서 왕비가 배출됐고 조선시대에는 하씨 집안에서 영의정이 탄생했다. 구한말 파리장서(巴里長書) 초안을 작성한 후 일경에 빼앗길까봐 짚신을 삼아 한양으로 갔던 면우 곽종석도 이 마을 출신이고, 국악계의 큰 별인 기산 박현봉도 남사예담촌이 고향이다.

남사마을이 여행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아름다운 돌담길 때문이다. 지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돌담과 토담은 전체 5.7km에 이르는데, 이 중 3.2km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예담촌’이라는 이름도 ‘옛 담 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씨고가는 남사예담촌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성주 이씨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이씨고가로 가는 골목에는 수령 300년이 된 회화나무 두 그루가 X자로 굽은 채 자란다. 회화나무는 보통 곧게 자라는 편인데 이 회화나무는 특이하게도 서로 몸을 껴안는 듯 자란다. 그래서 금실 좋은 부부나무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이 나무 아래를 통과하면 부부가 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자, 이제 대문을 밀고 이씨고가 안으로 들어가 보자. 마당에 들어서면 사랑채와 외양간 사이 뜰에 거대한 회화나무가 또 한그루 있다.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다. 수령은 무려 450년. 허리 높이까지 푸른 이끼에 뒤덮인 회화나무는 풍수지리상 화기를 막기 위해 심었다. 이 덕분인지 몰라도 미군 폭격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될 때도 이씨 고가는 멀쩡했다고 한다. 이씨고가의 대문은 다른 양반집과는 달리 북쪽을 향해 약간 낮게 나 있는데, 이는 선비가 문을 드나들 때마다 임금이 계신 방향으로 머리를 숙여서 충성심을 되새기고자 한 것 때문이다.

산천재와 매화나무.
산천재와 매화나무.

이씨고가와 함께 돌아볼 만한 곳이 최씨고가다. 마을주차장에서 높은 담장을 따라 걷다 ㄱ자로 급하게 꺾어지면 멋진 한옥 한 채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최씨고가는 전통적인 남부지방의 사대부 한옥으로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두 개라는 점이 특이하다. 최씨고가에도 멋진 나무가 있다. 사랑채 우측에 자리한 홍매다. 마을 오매 가운데 하나인데, 대문 입구의 200년생 회화나무, 서중문 앞의 백송, 동중문 앞의 목련과 어울려 3, 4월이면 하늘 한 켠을 화사하게 수놓는다고 한다.

마을을 흐르는 남사천을 너머 상사 산언덕으로 가면 이사재가 있다. 밀양박씨 송월당공파를 이룬 송월당 박호원의 재실이다. 이사재는 아름다운 건축물로 이름이 높다. 이사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의 인연도 깃들어 있다. 때는 1579년 6월. 이순신 장군이 이곳 박호원의 집에서 묵어간 기록이 《난중일기》에 보인다. 당시 53세의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으로 죄인으로 몰려 옥고를 치르다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할 때였다. 그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 영전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길을 떠나가다가 하룻밤 머문 곳이 이곳 이사재다.

남명의 올곧은 정신을 되새기다

산청을 대표하는 인물은 남명 조식이다. 남명은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 평생 벼슬을 사양하고 살았던 올곧은 선비로, 당대의 거유 이황과 쌍벽을 이룬 학자이기도 했다.

남명의 사상은 실천을 강조하고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러한 입장은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곽재우, 정인홍, 이제신, 김효원, 문익성, 하항 등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많은 이들이 바로 남명의 제자들이다.

남명 조식 동상.
남명 조식 동상.

아이들과 함께라면 남명기념관에 꼭 들어보자. 남명 선생과 관련한 각종 유품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남명의 올곧은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품이 성성자와 패도다. 남명이 항상 지니고 다녔다는 이 두 가지 유품은 남명 사상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성성자는 방울이다. 성성자는 늘 깨어있는 정신상태를 말하는데, 남명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늘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패검은 칼이다. 패검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하루는 경상감사가 부임하면서 남명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감사가 남명의 패검을 보고 "무겁지 않으십니까"하고 물었더니 남명은 "뭐가 무거울 것이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그대의 허리에 찬 돈주머니가 무거울 것 같은데"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감사가 사죄하면서 "재주가 없이 무거운 책임을 맡아 잘 해낼지 걱정"이라며 고개를 숙였다고 전한다.

남명기념관 건너편에 산천재가 있다. 산천재는 남명 선생이 61세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머물던 곳. 젊은 시절 유학과 노장학 등 온갖 학문을 두루 섭렵한 남명이었지만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던 까닭에 퇴계 등의 천거를 뿌리치고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와 산천재를 짓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산천재는 불과 서너 칸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건물이지만 앞마당에 서면 지리산 천황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면 산천재가 품고 있는 풍경의 넓이로 봐선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이 아닐까 싶다. 산천재 앞마당에 있는 매화나무를 눈여겨보자. 남명 선생이 산천재를 지으면서 심은 매화나무로 세상 사람들은 이 나무를 ‘남명매’라고 부른다. 나이가 440년을 훌쩍 넘었지만 지금도 맑고 눈부신 꽃을 피운다.

[여행 정보]

어탕국수.
어탕국수.

경호강에서 잡은 물고기로 만든 어탕국수가 유명하다. 맵고 짜고 알싸한데다 얼큰하며 달짝지근하기까지 하다. 강한 향과 자극적인 맛이 뒤섞여 있다. 전형적인 경상도의 맛이다. 국물까지 한 그릇을 다 먹으면 속이 따뜻해지고 온몸에 땀이 쫙 흐르는 것이 보약 한 첩을 먹은 것 같다. 생초면 어서리에 자리한 늘비식당(055-972-1903)이 유명하다. 피라미 튀김도 함께 맛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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