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가 만난 사람] 공백 없이 61년 '트로트 슈퍼스타' 하춘화

12시에 취침-6시 기상...아버지께 배운 '노력하는 삶' 실천
'왕년' 운운하는 사람들 가장 우수워...늘 사랑받으려 노력
코로나로 취소된 60년 공연...연말에 서울·부산 등서 계획

큰 눈, 맑은 목소리의 하춘화는 한 번의 공백기도 없이 61년째 활동을 이어 오는 준비된 현역가수다. /인터뷰365
큰 눈, 맑은 목소리의 하춘화는 한 번의 공백기도 없이 61년째 활동을 이어 오는 준비된 현역가수다. /인터뷰365

지난 10월 20일 신영균예술문화재단에서 개최한 제12회 ‘아름다운예술인상’시상식에서 가수 하춘화가 굿피플예술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올해로 61년째, 한 번의 공백기도 없이 활동해온 트로트의 슈퍼스타 하춘화(67)는 여전히 현역이다.

그는 콘서트의 원조 격인 극장 쇼 시대의 화려한 전설로 기록되어 있다. 무대 공연 기록이 세계 신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때가 1991년이다. 필자가 기자로 그녀를 만나 기사를 쓰기 시작한 지도 40년이 지났다. 하지만 큰 눈동자에 주름 없는 얼굴, 맑은 목소리와 날씬한 몸매는 세월도 비켜간 듯 ‘젊은 하춘화’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치지도 변하지도 않고 열정을 유지하며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상을 받고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 인연 깊은 가수 하춘화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변하지 않았다. 20여 년 전 모습 그대로다.

"나이를 잊어버리고 산다. 공연 활동이 옛날 같지는 않지만, 불러주는 곳 많고 만나야 할 사람 많아 하루가 늘 분주하다. 늙는 줄 모르고 시간 가는 줄,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바쁘게 열심히 살아서 그렇다. 요새는 체력 유지를 위한 운동도 열심히 한다. 보통 밤 12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6시에 꼭 일어난다."

-바쁘게 사는 게 몸도 마음도 젊게 사는 비결인가?

자타가 인정하는 일중독자로 살아왔다. 군인들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상시 출전 준비를 하고 있듯이, 나도 언제든 바로 공연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일상생활을 한다. 스스로 준비된 가수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모든 직종의 직업인들이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로 다른 사람보다 더 인정을 받으려면 최선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가수라고 다를 게 없다."

-평생 준비된 가수로 살게 되면 스케줄이 없어도 쉬지 못하고 긴장감 속에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6살에 무대에 올랐다. 7살에 독집 음반을 발표하고 리사이틀의 여왕 소리를 들어가며 공연을 해왔다. 아버지가 내게 일찍부터 일깨워 준 인생관이 노력하는 삶이다. 노력한 만큼 결실을 거두고 빛을 낼 수 있으나 요행을 바라고 일을 하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준비된 가수' 하춘화는 "언제든 바로 공연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일상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365
'준비된 가수' 하춘화는 "언제든 바로 공연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일상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365

-고향인 전남 영암에 한국트로트가요센터가 건립됐다는 기사를 봤다.

"센터 2층에 나의 가요 60년을 소개한 기념관도 마련해주었다. 물론 나뿐 아니라 우리 가수들을 고루 소개한 기념관이다. 아버지께서 개관하기 직전인 2019년 7월 8일 별세하셨다.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만 해도 마음 아프다. 석 달을 기다리지 못하시고…."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연세가 어떻게 되나?

"104세. 올해 101살 되신 어머님은 살아 계신다. 요양병원에서 건강 관리를 해드리고 있다. 내가 모실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가요계 나이든 분들은 아버지 하종오 씨와 친분을 나눈 기억을 갖고 있다.

"1960년대부터 활동한 가요기자들은 모두 아버지의 친구분들이다. 아버지는 생전에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수많은 히트곡을 만든 반야월 작곡·작사가와 가장 가깝게 지냈다. 내가 고봉산 가수와 부른 ‘잘했군 잘했어’도 그 분이 만든 노래였다."

-61년 동안 가수로 살아오는 동안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떠올린다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1974년 10대 시절 서울 아세아극장에서 첫 ‘하춘화 쇼’를 개최했을 때. 줄 서 있는 관객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순간이다. 내 노래를 듣기 위해 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열광하는 광경이 신기해 보이기도 하고 두려웠다. 가까이에 있던 상가 연결다리가 무너진다고 난리를 치던 목소리도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 같다.

"신문에서 공연 5일간 3만 명이 운집했다고 보도한 것 같다."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가수 하춘화 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1977년 이리(현 익산)역 열차 폭발사고다. 당시 근처 극장에서 공연 중이었는데 코미디언 고(故) 이주일 등에 업혀 탈출했다는 뉴스가 화제에 올랐다. 이후무명의 이주일이 스타로 떠오른 데는 하춘화가 배경이 됐다는 얘기도 따라 다녔다.

이주일과 하춘화.
이주일과 하춘화.

"이주일 씨는 40대 늦은 나이에 크게 성공했다. 그 성공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타고난 재능 덕분이었다. 다만 내가 소속된 회사가 방송 출연의 기회를 만들어준 배경은 있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마음 아프다."

-주변에는 오래도록 정을 나누며 산 인연들도 많을 것이다.

"송해 선생님은 그야말로 아버지 같은 분이다. 무선 마이크가 없던 시절 어린 내가 공연을 할 때면 스탠드 마이크를 들고 입 가까이 맞춰주던 분이었다. 서초동 인근에 사셨는데 내가 생신 때 대접을 하면 너무 행복해 하셨다.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지낸 사이였다."

-6살부터 오르지 한길, 가수로서 보낸 삶에 대해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는지.

"공연은 언제나 성취감의 기쁨을 안겨준다. 객석의 박수와 환호소리를 들으면서 혼자 2시간 공연을 이끌어 갈 때는, 내가 한 마리 새가 되어 팬들의 뜨거운 시선에 실려 날아다니는 희열감을 느꼈다. 나는 왕년에 누구였다, 과거 내가 누구인데 하고 지난 세월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을 가장 우습게 생각한다. 내 스스로 과거의 하춘화가 어떤 인기를 누렸는지를 과시한 적이 없다. 그저 지금의 하춘화로 최선을 다해 노래를 하며 지금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준비된 가수로 살고 있다. 아쉬움? 후회? 내 인생에서 그런 생각을 깊이 해본 적이 없다. 현재도 앞으로도 무리하지 않게 주어진 여건의 분수를 지키며 열심히 사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다."

필자와 함께 한 하춘화. /인터뷰365
필자와 함께 한 하춘화. /인터뷰365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떻게 마무리할 계획인가?

"지난해 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60주년 기념공연을 좀 거창하게 준비했다가 코로나로 취소했다. 올 연말에는 서울·부산·대구·남해에서 디너쇼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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