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한국기독교 前史

저자가 요약해 들려주는 <한국사람 만들기>제3권, 두번째 시간이다. 한반도 주민들이 백성에서 국민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 현대문명으로서의 기독교, 영성운동(=개인의 각성)으로서의 개신교가 얼마나 깊숙이 관여했는지 알아가는 길이다. 근대 자유민주주의가 싹을 틔우는 역사적 토대에 종교개혁으로 거듭난 기독교가 있었다. 한국 기독교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개신교와 민주주의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546)가 촉발시킨 유럽의 ‘종교개혁’은 1000년간 지속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 체제를 무너뜨린다. 14세기 초부터 시작된 자연재해와 전쟁 그리고 세기 중반부터 창궐한 흑사병으로 종교개혁 전야의 유럽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유럽의 유일 종교였던 가톨릭 교회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긴커녕 내부 분열로 혼란을 가중시키면서 몰락하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의 정문에 95테제를 못 박고 있는 마틴 루터.
피터르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 중세의 참상을 그리고 있다.

종교개혁은 말세 같은 중세 말기의 상황을 설명하고 극복하기 위해 인간과 신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 교회의 역할을 새로 규정하며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건설하기 위한 제도적 대안을 마련한다. 종교 개혁가들은 당시의 참상이 빚어진 이유에 대해, 신의 뜻을 잘못 이해하거나 왜곡함으로써 악의 세력이 판 칠 수 있는 여지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신의 뜻을 왜곡하는 주범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목하면서 중세 교회의 신학과 제도를 비판한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은 ‘구원’이 가톨릭 교회의 사도직이나 제례·전통을 통해 이뤄지는 게 아니라 ‘오직 신앙(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총(sola gracia)’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면서 중세 교회의 존립 기반을 부정했다. 일례로 당시까지만 해도 라틴어 번역본 밖에 없어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만 읽고 해석할 권한을 가지던 성경을 각 현지어(vernacular)로 번역해 배포한다.

이로써 일반 신자들도 손쉽게 성경을 읽으면서 교회의 중재 없이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직접 읽고 듣고 해석할 수 있게 됐다. 종교 개혁가들에 의한 자국어 성서 번역과 보급은 신자 개개인들로 하여금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줬을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문자 해독률을 급격히 높였다. 프랑스에선 1495년 장 드 렐리(Jean de Rely, 1430~1499)가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선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의 영어 성경이 보급된다. 때마침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68)가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술이 대중화 되면서 현지어 성경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존 위클리프.
존 위클리프.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구텐베르크 인쇄기. 성경 보급이 가능해져 종교개혁의 추동력을 만들었다.


개신교파들은 성경을 현지어로 번역하고 보급하는 동시에 일반 대중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교육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개신교가 뿌리내린 독일·스코틀랜드·잉글랜드·네덜란드·미국 등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자 해독률과 교육 수준을 자랑하게 된다.

가톨릭 교회의 역할과 권위가 도전 받기 시작하자 수 많은 군주와 영주, 도시와 속지(屬地)들이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면서 유럽은 겉잡을 수 없는 종교적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독일 농민전쟁(1524~1525) 슈말칼덴 전쟁(1546~1547) 뮌스터 반란(1534~1535) 위그노 전쟁(1462~1598) 네덜란드 독립전쟁(80년 전쟁, 1546~1648) 30년 전쟁(1618~1648) 주교 전쟁(1639~1640)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 1642~1651) 등 수많은 전쟁으로 유럽은 갈갈이 찢겼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간신히 종교전쟁에 종지부를 찍지만, 100여 년에 걸친 처절한 이념 갈등과 전쟁으로 중세 유럽의 이념과 체제는 붕괴한다.

개혁교회

가톨릭 교회는 1000년간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에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1274)에 이르는 대 사상가들을 통해 정교한 신학체계·교리·교회제도를 완성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와 전통과 학문을 가진 체제에 도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교 개혁 초기에는 이를 대신할 수 있는 개신교 만의 새로운 신학·교리·교회 제도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개혁가가 없었다.

루터도 자신이 거부한 가톨릭 교회를 대신할 새로운 교회를 설계하진 않았다. 영국의 종교개혁을 밀어 부치면서 ‘성공회’를 설립한 헨리 8세(1491~1547, 재위 1509~1547)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터교나 성공회는 아직도 교회 체제나 제례양식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의 것들을 대부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반면 칼뱅은 가톨릭 교회를 대체할 ‘개혁교회’의 이론적 제도적 틀을 확립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그의 대표작 『기독교 강요(基督敎綱要,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기독교 신앙의 제도들)』와 『교회법규(Ordonnances eccl?siastiques)』는 중세 가톨릭 교회와 전혀 다른 모습을 갖춘 새 교회의 이론·제도를 제시한다.

영국왕 헨리 8세.
영국왕 헨리 8세.
장 칼뱅.
장 칼뱅.
‘기독교 강요’ 초판 표지.
‘기독교 강요’ 초판 표지.


유럽의 중세 봉건 사회는 3개 신분(Three Estates) 즉 ‘제1신분 성직자’ ‘제2신분 귀족’ ‘제3신분 평민’으로 구성된 계급 사회였다. 봉건 사회에서 성직자가 얼마나 중요한 계급이었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 신분은 자체의 위계질서를 갖고 있었다. 성직자는 교황·추기경·주교·일반 사제 등의 위계 질서를, 귀족은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과 기사 등의 위계 질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칼뱅은 교회 내에서 일체의 계급·신분·서열·위계를 거부한다.

그는 『신약성서』가 명시하는 교직은 목사(pastor) 박사(doctor) 장로(elder) 집사(deacon) 등 넷뿐이라며 그 외 모든 직책을 철폐했다. 그리고 목사·박사·장로·집사 등 교회에 봉직하는 성직자들은 모두 일반 교인들이 선출하도록 한다. 다만 목사·장로·집사의 임명을 비롯한 교회 내부의 사안들을 책임지도록 ‘장로회(consistory)’를 둔다.

칼뱅이 고안한 개신교 체제는 교황청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 교회처럼 중앙집권화 된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서로 대등했다. 교회의 모든 문제를 일사분란 하게 처리해서 위로부터 집행할 수 있는 체제도 기구도 없었기에 모든 사안은 각 교회가 목사와 장로회, 일반 교인들 간의 협의와 회의, 토론과 투표를 통해서 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티칸처럼 중앙에서 모든 교회를 통솔하는 기구가 없으므로 교회들 간의 문제 역시 협의와 회의, 토론과 투표를 통해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철저하게 분권화되고 민주화된 체제였다.

칼뱅이 고안한 ‘장로회’ 체제는 제네바 같이 봉건 군주와 가톨릭 교회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꾀하던 도시·영지·속지 등이 적극 받아들이면서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종교개혁과 정치혁명을 일으키며 봉건 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 정치·경제·사회 체제를 발전시킨다.

개신교의 이론과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는 칼뱅의 시도가 알려지면서 제네바는 종교개혁가들의 성지가 된다. 칼뱅은 새 교회의 모델을 배우고자 하는 개혁주의자들을 적극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자신의 이론과 제도를 전수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주도하며 ‘장로교’를 창시한 존 녹스(John Knox, 1513~1572), 훗날 ‘청교도(Puritans)’라 불리게 되는 영국의 종교개혁가들은 모두 제네바에서 칼뱅의 새 교회 모델을 배운다. 칼뱅의 모국 프랑스의 개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s)들 역시 칼뱅의 새로운 이론과 제도를 적극 받아들였다. 프랑스 종교개혁이 가톨릭의 반동으로 비록 실패하지만 위그노들은 인접국인 네덜란드·잉글랜드·스코틀랜드, 그리고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대거 이주해 그곳의 개신교 사회 건설에 동참한다.

설교하는 존 녹스.
설교하는 존 녹스.
장로 안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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