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대응해 국내 배터리 업계가 북미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는 가운데, 북미에서 한국산 배터리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미국 오하이오주 소재의 LG에너지솔루션과 제너럴모터스의 합작공장. /연합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대응해 국내 배터리 업계가 북미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는 가운데, 북미에서 한국산 배터리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미국 오하이오주 소재의 LG에너지솔루션과 제너럴모터스의 합작공장. /연합

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북미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나가고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으로 중국 배터리 업체들이 주춤하면서 그 틈을 파고든 것이다. 더욱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라 내년부터 핵심광물 사용 비율 제한이 본격 시작되면 중국을 제치고 북미 배터리 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할 기회가 생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과 손잡고 북미 생산기지 확충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안정적인 배터리 생산·공급체제를 구축해 글로벌시장 탈환을 위한 디딤돌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5일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10월 북미 지역에서 판매된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은 56.4기가와트시(GWh)다. 이 가운데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3사의 점유율은 36%이다. 세 곳 모두 톱5에 드는 호성적을 기록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18%의 점유율로 2위에 올랐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646%나 뛴 SK온은 10%의 점유율로 4위를 차지했다. 282% 성장한 삼성SDI는 5위를 기록했다.

1위는 48%의 점유율로 일본의 파나소닉이 차지했다. 이는 북미 전기차 시장 1위인 테슬라를 고객사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CATL 역시 테슬라에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는 덕분에 북미 시장 3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시행되면서 미국 내 투자가 제한적인 CATL의 북미 시장 점유율은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내년부터 미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생산된 핵심광물의 40% 이상을 사용해야 보조금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비율은 매년 10%씩 높아지며, 2029년에는 100%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이는 중국 업체에 최대의 악재로 작용하는 반면 북미 투자를 늘리고 있는 국내 배터리 업체엔 호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배터리 업체와 글로벌 완성차 업체 간 합종연횡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배터리 업체는 확실한 고객사를 확보할 수 있고, 완성차 업체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공급처를 마련할 수 있다. 더구나 인플레이션 감축법 보조금 조건 등을 한 번에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금상첨화인 셈이다.

최근 배터리와 완성차 업계는 단순히 수요와 공급 관계를 넘어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동맹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제너럴모터스(GM), 스텔란티스, 혼다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과 함께 북미에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특히 미시간주에 있는 LG에너지솔루션의 단독공장까지 포함하면 2025년 북미 지역 생산능력은 250~260GWh에 달할 전망이다.

SK온은 현대자동차그룹과 손잡고 미국 전기차 시장 공략을 위한 협력을 이어가기로 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현재 미국 조지아주에 55억 달러를 들여 연 30만대 이상의 전기차를 생산할 수 있는 생산공장을 짓고 있는데, 이곳에 SK온이 연산 20GWh 규모의 배터리 생산공장을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앞서 SK온은 포드와 함께 전기차 전용 배터리 생산 합작법인을 설립한 바 있다.

삼성SDI도 스텔란티스와 인디애나주에 연산 23GWh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삼성SDI는 GM, 볼보와도 합작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터리 업계의 한 관계자는 "해외 완성차 업체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충족하는 배터리의 양이 부족한 상황에서 국내 배터리 업체와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라면서 "앞으로 기술과 경험이 풍부한 국내 배터리 업체와의 합작공장 설립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재무부는 이달 말까지 구체적인 시행 방안이 담긴 인플레이션 감축법 가이드라인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에 따라 국내 배터리 업계의 발목을 잡아온 핵심광물 규정은 더욱 완화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핵심광물의 조달 지역을 기존 미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우방국’으로의 확대를 시사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핵심광물의 탈(脫)중국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국내 배터리 업계에는 겹호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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