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조우석

최근 흥미롭게 읽은 건 삼성 고(故) 이건희 회장 스토리다. 그는 단순한 기업인을 떠나 우국충정의 애국자이고 시장경제의 수호자이며, 그게 그의 숨겨진 진면목이란 것이다. ‘월간조선’ 최근호에 이건희 회장을 증언한 사람은 삼성 홍보맨 출신의 이순동 씨다. 오래전 삼성 전략기획실 사장을 역임한 그의 말엔 별다른 곡절이 있을 리 없으니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될 법하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정말 순수하게 나라 걱정하고 밤잠 못 이루는 게 이건희 회장의 삶이고 일상이었다. 처음엔 "이분이 대통령하려는가?"싶었을 정도다. 3세 경영인 이재용 회장에 대해서도 "그 DNA가 어디 가겠습니까?"라고 그는 함축해 말했다. 이게 흥미로운 건 선대인 호암 이병철 회장으로 올라가는 사업보국 DNA 때문이다. 그건 호암의 공식 전기 <호암자전(自傳)>(중앙일보 1986년)에 자세히 서술돼 있다. 스토리는 이렇다.

삼성의 모태인 삼성상회를 대구에서 시작했던 게 1938년이다. 그 직전 경남 마산에서 26세에 손댔던 게 곡물 거래를 겸한 정미·운수사업인데, 그게 썩 잘됐다. 문제는 식민지 상황에서 오는 허탈감이 겹쳐 일제말 기방 출입 등으로 방일(放逸)하게 살았다는 게 그의 진솔한 고백이다. 그러다가 해방 직후 정신이 번쩍 났다. 어느 정도였을까? 26세 때 사업 투신이 제1의 각성이라면, 해방 뒤 사업보국의 신념은 제2의 각성이었다.

그 직후 1946년 대구폭동을 겪었고, 당시 대구에 내려온 우남 이승만을 실업인 자격으로 만나 인연을 맺으며 사업보국은 기업철학으로 굳어진다. 맞다. 그렇다면 사업보국은 삼성의 DNA인데, 실은 그건 전시대의 거의 모든 기업이 공유했던 가치이기도 했다. 그게 중요하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중공업 사업장에 붙여놓은 구호만해도 그렇다. "우리가 잘되는 게 나라가 잘되는 일이며, 나라가 잘되는 게 우리가 잘되는 길이다."

그런 인식은 기업 이름에도 배어있다. 트럭 한 대로 출발했던 조중훈의 한진은‘한민족의 전진’을 함축한다. 김철호가 설립한 기아(起亞)는 ‘기계공업을 발전시켜 아시아로 세계로 진출한다’는 의미다. 사업보국 유산은 지금은 희미해진 게 사실이다. 그래도 다 죽은 건 아님을 너끈히 재확인해준 이순동 씨 증언은 그래서 새삼 의미있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