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24) 반성없는 한총련, 막장으로 치닫다

전남대서 이종권씨·한양대서 이석씨, 학생들에 의한 고문치사...야당도 "해체해야"
총학생회서 새벽까지 구타...한총련 조통위원장 "전시에 인륜 생각하냐" 고문 독려
이종권씨 고문치사 사건 주모자 강위원·정의찬, 이재명 대표 측근으로 활동하기도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과 자민련의 김종필은 DJP연대를 가동했다.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과 자민련의 김종필은 DJP연대를 가동했다.

민간통일운동의 통제에서 벗어나 범민련 남측본부와 범청학련, 경기동부그룹 중심의 종북 주사파 지시를 받았던 한총련은 연세대 사태를 경험하고도 전혀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세대에서의 철수를 주장했던 온건파를 적과 내통한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과격하고 폐쇄적인 조직노선을 추구했다.

이러한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한총련의 종북, 과격주의는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사건을 초래하고 말았다. 바로 97년에 벌어진 이종권 씨와 이석 씨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이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 한총련은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고, 급기야 정권교체가 된 98년 7월 대법원으로부터 ‘이적단체’라는 불명예를 얻고야 말았다.

계속되는 대형 사건 사고, IMF구제금융사태

97년 대한민국은 대형 사건 사고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새해 벽두 여당인 신한국당은 안기부법, 노동법을 개악하는 날치기를 감행했다. 곧이어 한보, 기아 등 대기업이 연쇄 부도를 내고 도산했다. 이어 ‘한보비리’ 사건에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 씨가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북한에서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일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북경의 한국 대사관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일성 사후 3년 만에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가시화되며, 이에 대한 반발로 한국행을 선택한 것이다. 황장엽 비서의 탈북은 일부에서 북한의 김정일 체제에 대한 붕괴 조짐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한보, 기아, 해태, 진로, 한라 등 대기업의 연쇄 부도 사태와 김현철의 구속은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을 급속히 약화시켰다. 더구나 김영삼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최형우 의원이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후계 구도가 크게 흔들렸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에게 맞서다 총리를 사퇴한 이회창을 신한국당 대표로 세워야만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 약화는 기아 등 대기업의 연쇄 부도 사태를 수습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삼성 등에서 기아 자동차를 인수하려는 움직임에 노조는 연일 파업과 시위로 맞섰다. 야당에서도 전혀 협조하지 않아 기아 사태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그 사이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과 자민련의 김종필은 DJP연대를 가동했다.

끊임없이 터진 대형 사건 사고는 97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육지(삼풍백화점 붕괴)와 바다(서해 페리호 침몰, 씨프린스 유조선 침몰)에서 벌어지던 참사는 결국 공중에서도 일어나고 말았다. 국내 여행객을 싣고 괌으로 가던 대한항공이 추락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254명 중 25명이 부상하고 229명이 숨졌다.

이처럼 김영삼 정부의 통치 불능 사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제통화기금(IMF)에게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사태로 치달았다.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며, 150만 명 이상이 직장을 잃었다. 급기야 연말 김영삼 정부의 인기는 10% 이하로 떨어졌고, DJP연대와 이인제 후보의 등장으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DJP연대’ 등 보수화에 반발한 전국연합, 민주노총

97년을 놓고 일부에서는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50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짐으로써 ‘민주화운동의 승리’라는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재야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97년 전국연합 등 재야 운동은 물론 한총련 등 학생운동도 길을 잃고 표류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즉, 97년 연초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에 대해 전국연합과 민주노총, 한총련은 연대투쟁을 통해 저지에 나섰고, 국민의 여론도 우호적이었다. 이에 김영삼 정권은 날치기한 노동법, 안기부법을 재개정하겠다는 약속하며 물러서야만 했다. ‘국민속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건 민주노총의 승리였다.

이에 고무된 전국연합 상층부과 민주노총은 ‘국민정당 건설’과 ‘독자 대선후보 전략’으로 치달았다.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는 대선 시기에 독자후보를 내고, 이를 통해 진보적 국민정당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새정치국민회의가 DJP연대를 가동하면서 보수화 경향을 보이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 약화는 기아 등 대기업의 연쇄 부도 사태를 수습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 약화는 기아 등 대기업의 연쇄 부도 사태를 수습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전국연합 상층과 민주노총의 ‘독자후보’ ‘국민정당 건설’ 노선은 한총련 등 학생운동과 분리되었다. 한총련의 주류를 장악하고 있는 종북 주사파 진영은 ‘수평적 정권교체’를 지지하며, 야당과의 연합전술을 중심에 두고, 전국연합 상층과 민주노총의 독자후보, 국민정당 건설 노선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94년 조문파동, 95년 새통체(새로운 통일운동체, 민족회의) 건설과 범민족대회, 96년 한총련의 연세대 사태로 분열되었던 상황이 더욱 심해졌다. 또 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한총련의 폭주로 학생운동 내부의 분열양상도 심각해졌다. 96년 말에 치러진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한총련 주류는 48%를 점유했을 뿐이다.

통일운동에서 전국연합 등 재야 지도부와 분리되고, 노동법 날치기 파동에 맞선 투쟁에서 민주노총과 분리된 한총련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그것은 한양대에서 벌어진 한총련 출범식에서 이석 씨 폭행 치사사건 후 명동성당을 찾은 한총련이 퇴짜를 맞고, 신한국당과 새정치국민회의 등 정치권에서 ‘한총련 해체’ 촉구성명이 나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한총련은 범민련 남측본부와 해외 범청학련과의 연계만 강화하며 자기들만의 길을 갔다. 이석기 등 경기동부그룹과 범민련, 등 종북 주사파 진영과만 연대하였다. 이러한 한총련의 종북 과격주의는 급기야 이종권, 이석 씨 고문치사 사건으로 이어졌다.

막장 한총련이 벌인 이종권, 이석 씨 고문치사 사건

4월 4일 한총련 대의원대회에서 5기 의장으로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강위원이 당선되었다. 남총련에서 4기 정명기 의장에 이어 5기 의장을 배출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남총련 의장은 조선대 총학생회장인 정의찬이 맡았다.

그런데, 5월 27일 전남대에서 이종권 씨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전남대를 동경하던 송원전문대 졸업생 이종권이 기계공학과 1년으로 속이고 ‘용봉문학회’에 가입한 것이다. 이에 구영민 동아리 회장은 이종권이 선배들 이름을 모른다는 이유로 경찰이 보낸 프락치로 오인했다.

구영민에 의해 총동아리연합회로 호출된 이종권은 다시 남총련 정책위원인 이승철에게 인계되었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에 의해 동아리 내부 별실로 끌려갔다. 곧이어 도착한 남총련 간부들은 이종권을 다짜고짜 고문하고 폭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종권에게 경찰 프락치라는 것을 실토하라며, 27일 새벽 3시까지 7시간 동안 가혹행위를 계속했다.

이종권에게 폭행을 가한 남총련 간부들은 의장인 정의찬을 비롯해, 이승철, 장형욱(정책위원), 전병모(전 순천대총학생회장, 남총련 기획국장), 최석주(전남대 총학생회 오월대장), 전연진(투쟁국장), 등 6명이었다. 이들은 주먹과 쇠파이프로 이종권을 폭행했고, 구토하는 이종권에게 소화제를 강제로 삼키게 했다. 결국 강제로 삼킨 소화제가 기도에 걸려 질식 사망하였다.

이종권이 사망하자 당황한 남총련 간부들은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조동호(전남대 연대사업국장), 이진실(선전부장), 구광식(섭외부장), 김형완(남총련 투쟁국장), 송선주(남총련 95년 투쟁국장), 강재학(고문) 등이 모여 회의를 한 후 사건을 은폐하기로 하고 "우연히 이씨를 발견하고 응급조치했으나 사망했다"라고 말을 맞추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는 것이 맞냐"며 이종권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한 것이 확인되었고, 경찰의 기지국 조사에 의해 전남대 총동연 사무실에서 전화가 온 것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정의찬 남총련 의장이 구속되어 징역 5년에 자격정지 3년, 벌금 2000만 원을 선고받는 등 관련자 18명이 구속되거나 법적인 심판을 받았다.

이석 씨 고문치사 현장검증.
이석 씨 고문치사 현장검증.

이석 씨 고문치사 사건은 97년 6월 3일 한총련 출범식이 열리는 한양대에서 벌어졌다. 한총련 출범식이 열리는 한양대 근방을 지나가던 선반공 이석 씨를 경찰 프락치로 오인하고 납치하여 총학생회 사무실로 끌고 간 것이다. 이석을 총학생회 사무실로 끌고 간 한총련 간부들은 다음날 9시까지 이석 씨를 고문했다.

그들은 이석을 침낭으로 감싼 후, 물을 뿌려가며 경찰 진압봉으로 마구 폭행했다. 한양대 투쟁국장이었던 배주환은 의식을 잃어가는 피해자의 코에 최루가스 분말을 집어넣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 또 한총련 조통위원장인 이준구는 "전쟁 상황인데 인륜을 생각할 때냐"며 고문을 독려했다. 이석 씨는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석 씨가 사망하자, 또다시 이를 은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프락치를 심었기 때문에 사망자가 나오고 있다"는 식으로 강변했다. 책임을 김영삼 정권의 학생운동 탄압에 돌린 것이다. 또 "진술서를 쓰고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이 씨가 달려들어 목을 조르는 바람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며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길소연(한양대 교육학과 졸), 권순욱(건국대 2년), 이호준(건국대 3년), 김호(서총련 투쟁국장), 배주환(한양대 투쟁국장), 이준구(한총련 조통위원장) 등 한총련 간부 22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이종권, 이석 씨 폭행치사 사건은 한총련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연세대 사태 이후 이적단체로 몰리며 재판을 받고 있던 한총련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오죽하면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 ‘한총련 해체’를 공식으로 거론했고, 구명을 위해 찾아간 명동성당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한총련의 폭주는 11월 전국 대학에서 치러진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비운동권 후보가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오죽하면 전남대에서조차 비 한총련 계열이 당선되었고, 이들은 한총련 탈퇴 찬반투표를 진행했다. 과반이 참여하지 않아 결과가 반영되진 않았지만, 44% 참여(7,691명)했고, 이 중 86%(6,565명)가 찬성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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