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산업 전반에 경기침체의 공포가 확산하면서 기업들이 감산과 함께 설비투자를 대폭 줄이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사진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 현장. /삼성전자
국내 산업 전반에 경기침체의 공포가 확산하면서 기업들이 감산과 함께 설비투자를 대폭 줄이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사진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 현장. /삼성전자

경기침체의 공포가 국내 산업 전반에 드리우고 있다. 올해 세계 경제를 강타한 인플레이션으로 소비자들의 지갑이 굳게 닫히면서 기업들 창고에는 팔리지 못한 재고자산이 쌓여만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재고가 쌓인다는 것은 경기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는 의미다. 올해 3분기 기준 주요 기업들의 재고자산은 사상 최대 규모인 180조원을 돌파했다.

이처럼 R(Recession)의 공포가 확산되면서 기업들은 제품의 생산량을 줄이거나 설비투자 계획을 재검토하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더욱이 미국 월스트리트의 거물들까지 글로벌 경기침체를 잇달아 경고하면서 앞으로 설비투자를 포기하는 기업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국내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2023년 국내 투자계획’을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48%는 내년 투자계획이 없거나 세우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투자계획을 수립한 기업의 86.5%는 설비투자 규모를 올해와 비슷하거나 축소하겠다고 답했다.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기업은 13.5%에 불과했다.

기업들은 설비투자 규모를 줄이는 가장 큰 이유로 금융시장 경색·자금조달 애로(28.6%)를 꼽고 있다. 원·달러 환율상승(18.6%)과 내수시장 위축(17.6%)도 기업들의 설비투자를 막고 있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고금리와 고물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쳄체 공포가 국내 기업들에 직격탄을 날린 셈이다.

기업 재고자산이 늘어나는 것도 기업들이 설비투자 규모를 줄이는데 한몫하고 있다. 설비투자를 늘려 미래를 준비하는 것보다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재고 처리가 더욱 시급하기 때문이다.

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삼성그룹, SK그룹, 현대자동차그룹, LG그룹 등 시가총액 상위 30곳의 3분기 재고자산은 181조6222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보다 62조7092억원 불어난 규모다.

내년 우리나라 수출은 6624억 달러로 올해보다 4% 감소할 것이라는 한국무역협회의 전망까지 나오면서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올해 3분기 어닝쇼크를 기록한 국내 반도체 업계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선도적으로 감산 및 설비투자 축소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실제 SK하이닉스는 3분기 컨퍼런스콜에서 반도체시장이 정상화될 때까지 수익성이 낮은 제품을 중심으로 감산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또 내년 예정된 설비투자 계획을 지난해의 절반 수준인 10조원 가까이 줄이기로 했다. 앞서 SK하이닉스는 4조3000억원을 투입해 반도체 신규 설비인 ‘M17’ 건설 계획을 전면 보류한 바 있다.

매년 공격적으로 설비투자 규모를 늘려오던 삼성전자 역시 내년에는 올해 수준을 유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 고용량 D램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원가 경쟁력을 강화해 수익성 중심으로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운영한다는 방침이다.

이뿐만 아니다. 다른 제조업체들도 속속 투자 계획을 조정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충남 서산 대산공장에 3600억원을 투입해 원유정제공정(CDU), 감압증류공정(VDU) 설비를 구축하기로 한 신규 투자 계획을 중단한다고 공시했다. 원유정제공정과 감압증류공정은 원유를 끓여 휘발유·경유 등을 생산하는 설비다.

한화솔루션 역시 최근 1600억원 규모의 질산유도품(DNT) 생산공장 설립 계획을 철회했다. 질산유도품은 가구나 자동차 시트에 주로 사용되는 폴리우레탄의 원료다.

이처럼 기업들이 앞다퉈 설비투자를 축소하거나 철회하면서 바클레이즈, 뱅크오브아메리카, 골드만삭스 등 주요 외국계 투자은행(IB)들은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올해 2%대 중반에서 내년 1%대 초반으로 급격히 낮췄다. 우리 경제의 내수 부진과 수출 둔화가 예상보다 깊을 수 있다는 점이 반영된 결과다.

설상가상으로 R의 공포가 확산되면서 내년 취업자 수 증가폭 역시 올해의 10분의 1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내년 취업자 수 증가폭은 8만4000명으로 올해 79만1000명에 비해 89.4%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기업들의 감산과 설비투자 축소 칼바람이 취업시장까지 얼어붙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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