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영웅 백선엽, 현충원에 모셔야
구국의 영웅 백선엽, 현충원에 모셔야
  • 김국헌 예비역 육군 소장,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 승인 202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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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생으로 향년 100세의 백선엽 대장이 운명하기 촌전이다. 1950년 북괴군의 8월 공세를 막아낸 1사단의 다부동 전투는 결정적이었다.

다부동이 무너지면 임시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된다. 8월 15일 다부동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30세의 청년장군이었던 사단장 백선엽은 부하들에게 “내가 등을 돌리면 나를 쏴라”는 필사의 각오로 사단의 선두에 섰다. 8월 16일 왜관 북서쪽 낙동강 변에 B-29 99대에 의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규모의 융단폭격’이 가해졌다. 다부동 전투는 8월 30일에 이르러서 일단락되었다.

다부동 전투는 북괴군 8월 공세의 예봉을 꺾었다. 그 후 백선엽의 1사단은 김종오의 6사단과 함께 국군의 선봉에 서게 되었고, 북진에서는 평양 입성의 선두에 서게 된다. 평양의 지리에 익숙한 백선엽은 1950년 10월 19일 대동강을 선두로 도하하여 평양에 입성한다.

백선엽은 평양사범 출신이었다. 백선엽은 이후 봉천군관학교를 거쳐 만주군에 들어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를 핑계로 백선엽을 친일군인으로 분류하였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 있다. 제정 러시아의 기병 중장이었던 만넬하임은 1939년 스탈린이 침공해오자 지형과 스키를 이용한 기동전으로 소련군을 섬멸한다. 만넬하임은 후에 대통령이 되고 사후 국부國父로 추대되었다

◇백선엽, 처형 위기 박정희 살려 

백선엽 장군

이승만 대통령 당시 대장은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세 분 뿐이었다. 그중에서 전공은 백선엽이 으뜸이었다. 릿지웨이, 밴플리트 등 미군장성도 백선엽을 가장 신임하였다.

2차 대전에 참전한 역전의 노장들에게 백선엽은 아들 같았으나, 백선엽은 가르치면 잘 받아들였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는 데는 이승만 대통령이 절대적이지만, 미국 군부에 처음 이 구상을 제기한 것은 백선엽이었다.

백선엽은 1952년 이종찬 후임으로 참모총장이 된 이래 정일권과 번갈아가며 참모총장과 1군사령관을 연임했다. 백선엽은 숙군과정에서 절체절명의 박정희를 살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여순반란사건 이후 군 숙정시 백선엽은 정보국장이었다. 박정희는 후배 백선엽에 구명을 탄원하였고, 백선엽은 박정희의 선처를 상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백선엽은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하게 하였는데, 625가 터지자 그는 현역으로 복귀하였다. 주한미군사령관은 부임하면 백선엽 장군을 찾아뵙고 인사하는 것이 관례다. 그들이 전설처럼 받드는 맥아더, 릿지웨이와 같이 활약했던 백선엽은 이제는 신화다.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창군 동지회 묘소가 있는데 이응준 장군 등의 6위가 안장되어 있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 묘소 뒤에 아직 한자리가 남아 있다. 백선엽장군은 당연히 여기에 모셔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百尺竿頭에서 나라를 구한 백선엽 장군에 대한 마땅한 국민적 도리다.

오늘의 우리가 이승만 대통령, 백선엽 대장에 얼마나 큰 덕을 입고 있는가를 후대가 명확히 아는 것이 국민교육의 으뜸이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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