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에 예의 갖추라던 송영길
윤미향에 예의 갖추라던 송영길
  • 박동원 정치평론가
  • 승인 2020.07.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미향 옹호하며 시민운동가에게 예의 갖추라? 웬 선민의식? 아무도 그 길 가란 적 없는데?

-87년이 변화발전 기점인 건 87년 이전과 이후 세상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요구하기 때문

-예의는 묵묵히 자기 길 갈 때 시민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 당사자 아닌 3자가 추켜주는 것

아침 기사를 뒤지다 윤미향을 옹호하며 시민운동가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한 송영길 의원의 발언 기사(송영길 “윤미향에 예의 갖춰야…父연봉 7580만원도 아니고”)가 눈에 띈다. 기사를 보니 1990년 초반에 불렀던 민중가요 <누가 나에게 이길을 가라하지 않았네>가 문득 떠올라 오랫만에 찾아 들었다. 그전에 운동가요를 들으면 울컥하기도 하곤 했는데 덤덤한 걸 보니 세월이 변했는지 내가 변했는지.

부모가 자식에게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하는 줄 아냐?”고 말하면, 그 말을 듣는 자식은 오히려 부모에게 “그럼 뭐하려고 낳았나?”며 반발한다. 자식에게 이런 말을 하는 부모는 부모로써 인간적인 존중은 받을지언정 존경받을 순 없다. 송영길 의원의 발언이 딱 그 짝이다. 아무도 너에게 그 길을 가라한 적 없는데 말이다.

윤미향에게 예의를 지키라고 한 송영길 의원의 발언은 87년 이후의 운동세력이 존경받을 수 없는 이유를 그대로 대변해 준다. 송영길 의원의 발언은 586들의 잘못된 선민의식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고 애정을 쏟는 게 자식을 위한 게 아니듯, 운동 또한 누굴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나도 한때 운동의 희생으로 세상이 바뀌고 역사가 진전한다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신심과 열정은 물론이고 능력도 학습도 그다지 없어 현수막이나 만들고, 나이 먹도록 학교 졸업 못하고 대자보나 쓰는 ‘따라지 운동권’이었지만 그래도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잉크 한 방울 튀겼다는 자부심 같은 게 있었다.

◇가슴 속에 있던 자부심,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자만심 돼

근데 자부심은 자기 가슴속에 넣어둬야지 그게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자만심이 되고, 스스로 희생이 되는 순간 보상을 바라게 된다. 그럼 더 이상 존경과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대상에서 멀어진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대차대조표는 수입과 지출의 아귀가 맞는 게 세상 이치다. 질량보존의 법칙은 인간계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87년을 변화발전의 기점으로 삼는 것은 87년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87년 이전이 투쟁의 시기였다면, 이후는 계몽의 시기다. 계몽을 거치지 않은 민주주의는 없다. 노무현의 ‘깨어있는 시민’은 열정이 조직된 시민이 아니라, 주체성을 갖춘 독립된 개인을 말한다. 계몽된 인간이다.

정대협 운동의 방향에 대해 진즉 비판이 일었던 것도 ‘투쟁하여 쟁취’하는 87년 이전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쟁취는 투쟁을 정당화한다. 전쟁에 룰이 없듯 비합법 반합법이 동원 될 수밖에 없고,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한다. 민주화의 적대적 투쟁 방식으로 민주주의의 성취를 일궈낼 수 없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실패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사회의 골간을 이루고 있는 586출신들이 87년 이전의 방식으로 87년 이후를 살아왔기 때문이다. 민주화는 적어도 역사가 떠민 측면이 있지만, 민주주의 시대엔 아무도 그 길을 가라하지 않는다.

예의는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갈 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갖추는 것이고, 당사자들이 아닌 3자가 추켜주는 것이다.

jayooilbo@jayoo.co.kr

더 자유일보 일시 후원

“이 기사가 마음에 들면 후원해주세요”

  • ※ 자유결제는 최대 49만원까지 가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