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커크
도널드 커크

12월 18일, 미국이 기억해야 하는 날이다. 반 세기 전인 1972년 12월 18일 닉슨 미 대통령은 하노이 등 북쪽 주요 도시들에 대한 ‘크리스마스 공습’을 명령했다. 12월 29일까지 미국 공군은 베트남전 중 최대 규모의 폭격을 감행했다. 이 폭격의 목적은 미군 철수 및 휴전을 골자로 한 ‘거짓’ 평화협정에 북베트남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파리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은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북베트남·남베트남·미국 사이에 베트남전 종결을 약속한 협정이다. 남베트남 정부가 도시 지역을, 국토의 대부분인 나머지를 북베트남이 차지하게 돼 있는 것이 협정 내용이었다. 이 협정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평화협정 이후 미군 등 남베트남에 주둔한 모든 군대가 모두 철수하자,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이 총공세를 감행했다. 불과 55일 만에 남베트남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했고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이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며 남베트남을 버린 이유 중 하나는 중국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키신저는 미국이 중국을 적대하던 정책을 뒤집기 위해 1971년 2번이나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했다. 1972년 7월 키신저가 북베트남 대표와 파리에서 협상하는 동안, 닉슨은 남베트남 정부를 약화시키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최우선시 했다.

미국은 베트남전 개입 이래 10년 동안 남베트남을 지키고자 했다. 그런 미국으로 하여금 남베트남을 외면하게 만든 건 결국 중국의 존재였다. 당시 닉슨과 키신저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몰두한 나머지 미국이 남베트남을 위해 싸워 왔다는 사실을 도외시했다. 파리평화협정 50주년이 머지 않은 현 시점에서 떠올리게 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닉슨 정부 이후 미국과 중국은 몇 년간 우호적인 단계를 거쳐, 1978년 12월 지미 카터 대통령 때 공식 외교관계를 시작했다. 중국에서 마오쩌둥 시대의 문화혁명은 지나간 역사인 듯했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명으로 어두운 과거와 절연한 나라 같았다. 하지만 이제 전 세계인들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좋았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시진핑 치하의 중국은 언론 자유가 금지됐던 옛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베트남전에서의 일은 과거가 됐다. 지금은 미국이 중국에 의지하는 북한 정권을 위해 (베트남전에서처럼)한국을 배신할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때다. 다행히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한국은 단순 민주주의 국가를 넘어,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남베트남보다 훨씬 번영된 자본주의 경제를 영위하고 있다. 남베트남은 무기의 대부분을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았지만, 한국은 필요한 무기들을 직접 생산할 수 있는 능력도 갖췄다.

파리평화협정 체결 50년이 되는 지금, 중국이 펼치고 있는 공격적인 정책들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이라는 동맹국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중국에 구애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중국이 북한 김정은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중국이 반대한다면 김정은이 7차 핵실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유사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것도 터무니 없다.

여러가지 면에서 북한과 북베트남의 사정을 비교하긴 힘들다. 북베트남은 정규군을 앞세워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기 전 베트콩을 통해 남베트남 내 게릴라전을 벌였다. 하지만 지금 북한은 정규군 파병 전 한국에서 게릴라전을 벌일 수 없다. 그 대신 북한에겐 핵탄두와 미사일이 있다.

미국은 반세기 전 중국에 다가가고자 남베트남을 배신한 결과를 교훈 삼아야 한다. 오늘날 중국의 공격성이 더해가는 가운데 한국을 방어해야 할 더 큰 명분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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