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정의 길 따라...] 경남 거창

고래등 기와집 50여채 황산마을...연산군 시절 거창 신씨들이 일궈
담장길 따라 골목골목 누비다 보면 활짝 열린 문에서 만나는 민심
수승대 명물은 계곡 한 가운데 거북바위...바위 표면에는 시구 가득

수승대의 비경.
수승대의 비경.

한옥 5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거창 황산마을 아직도 장작불을 들이는 방을 가진 집이 있고 마당 한 귀퉁이에 장독대를 만들어 놓은 집도 있다. 한옥도 한옥이지만 마을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흙담 길도 예쁘다. 낮은 담 사이로 난 골목길을 걷다 보면 마음이 아랫목처럼 따스해진다.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날씨가 차다. 새하얀 입김이 새어나오고 살갗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이 무렵 여행을 떠난다면 한옥에 하루쯤 묵어보는 것도 좋겠다. 처마에 반짝이는 영롱한 겨울 햇살을 눈에 담는 일, 밤이면 창호지로 스미는 달빛을 바라보는 일, 처마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물소리를 들어보는 일, 이 모든 일이 한옥에서 가능하다. 이불을 깔아둔 아랫목은 손을 넣자마자 ‘앗 뜨거.’ 하는 소리가 절로 난다. 고풍스럽고 기품있는 한옥은 오래된 친구처럼, 할머니의 품속처럼 정겹고 아늑하다.

돌담길 걸으며 느끼는 푸근한 정취

덕유산의 절경인 수승대를 끼고 자리 잡은 황산마을에는 100~200년 전에 지어진 한옥 50여 채가 운치 있게 들어서 있다. 황산마을은 거창 신씨 집성촌으로 조선 연산군 시절이던 1501년 신(愼)씨 일가가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만들어졌다. 지금도 마을주민 대부분은 신씨인데 마을을 거닐며 대문을 보면 대부분 신씨 문패가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승대 가는 길 얼어붙은 냇가에서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있다.
수승대 가는 길 얼어붙은 냇가에서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있다.

마을 입구에 서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여행객을 반긴다. 수령 600년을 훌쩍 넘긴 커다란 나무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느티나무 앞으로는 맑은 시내가 흘러간다는데, 마을은 이 시내를 사이에 두고 두 지역으로 나뉜다. 시내 동쪽은‘동녘’이라 부르고 서쪽은 ‘큰땀’이라 부르는데, 큰땀에 부드러운 처마의 한옥 기와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큰땀은 마을 입구에 들어가기만 해도 ‘양반마을’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마을 전체가 ‘고래등’같은 기와집들로 연이어 있기 때문이다. 황산마을의 한옥들은 대부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들이라고 한다. 

황산마을의 자랑은 한옥보다는 흙담길이다. 담장 위에 얹어놓은 여러겹의 기와가 독특하고 이채롭다. 2006년 등록문화재 259호로 지정되며 ‘전국의 아름다운 돌담길 10선’ 중 한 곳으로 뽑히기도 했다. 1~2km 길이의 토담이 600여 년 전에 이뤄진 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됐다고 한다.

황산마을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그냥 발길 닿는 데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 이 골목, 저 골목 낮은 담장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을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담장은 그다지 높지 않다. 까치발을 하면 담장 너머로 집과 마당이 훤히 바라보인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고택이 궁금하면 들어가 구경해봐도 좋다. 야박한 도시와 달리 낮에는 대문을 잠그지 않은 집들이 대부분이다. 문풍지를 발라 놓은 곁문들과 툇마루, 햇볕이 잘 드는 마당, 항아리 등 우리네 전통가옥에서 느낄 수 있는 비움과 열림의 미학, 넉넉한 인심의 향기가 배어 나온다. 

수승대 가는 길의 소나무숲.
수승대 가는 길의 소나무숲.

황산마을에서는 민박이 가능하다. 현재 10여 가구가 민박 손님을 받고 있다. 아직도 장작불을 들이는 방을 가진 집도 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하루쯤 묵어보자. 밤이면 은은한 문살 사이로 달빛이 새어든다. 소쩍새 소리와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보자. 대숲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마당을 천천히 거니는 일은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황산마을의 멋스런 담장길만큼 이쁜 곳이 또 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황산2구마을. 이 마을 담장에는 예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거창의 특산물인 사과와 명승지인 수승대의 수려한 경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발길 가는 대로 벽화를 따라 이 골목 저 골목을 걷다 보면 벽에 붙어 있는 나비와 잠자리, 주인 대신 집을 지키고 있는 강아지, 담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온 황소, 고구려 고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만날 수 있다. 또 마을 담장 위에는 손짓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황산마을은 고즈넉한 시골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수승대, 거창이 숨겨놓은 비경

거창하면 수승대를 빼놓을 수 없다. 거창 제일의 명소이자 덕유산이 간직한 절경이다. 황산마을 앞에 자리하고 있다.

600년 전에 만들어진 흙담.
600년 전에 만들어진 흙담.

주차장을 지나면 제일 먼저 구연서원 관수루(觀水樓)가 눈에 들어온다. 관수루는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림이 세운 구연서원의 문루로 영조 16년(1740)에 건립했다. 관수란 <맹자>에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관수루를 지나면 거북 모양의 특이한 바위가 나타난다. 수승대다. 수승대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만들면서 빚어 놓은 거북모양의 커다란 천연 바위 대(臺). 대의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에 이르는데, 생긴 모습이 꼭 거북과 닮았다. 

수승대라는 이름에 얽힌 내력이 재미있다. 거창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였다. 국력이 쇠약해진 백제가 신라로 가던 사신을 전별하던 곳이었는데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고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했다. 조선 중종 때는 요수 신권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구연서당 짓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신권은 바위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 하여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했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이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아름다운 경치에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로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요수 신권 선생이 이를 따르면서 지어졌다.

대청마루 앞에 단정히 놓인 고무신.
대청마루 앞에 단정히 놓인 고무신.

수승대의 명물은 계곡 한 가운데에 자리한 거북바위다. 머리와 등짝이 꼭 거북을 닮았다. 바위에는 요수와 갈천의 후손들이 서로 제 조상을 높이려 경쟁적으로 시구를 파놓았다. 바위 표면을 평면으로 다듬어서까지 이름을 새겨 빈틈이 없다. 바위 둘레에는 이황 선생의 옛글도 새겨져 있다.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하노니/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 먼 산의 꽃들은 방긋거리고/ 응달진 골짜기에 잔설이 보이누나/ 나의 눈 수승대로 자꾸만 쏠려/ 수승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언젠가 한 두루미 술을 가지고/ 수승의 절경을 만끽하리라"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洗筆?)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가 입을 벌린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룩을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이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이다. 바위 한쪽에 오목한 모양의 웅덩이가 있는데 이곳에 한 말의 막걸리를 넣었다가 스승에게서 합격을 받으면 막걸리 한 사발씩을 먹었다는 장주갑(藏酒岬)이다.

구연교 다리를 지나면 요수 신권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친 곳인 요수정(樂水停)이라는 정자가 눈앞에 들어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자연 암반을 그대로 초석으로 이용했다.

[ 여행 정보 ]

어탕국수.
어탕국수.

황산마을 전을주가옥(055-943-0141),신순범가옥(055-943-0648), 신용원가옥(055-942-5804), 신외범가옥(055-943-0003), 신종범가옥(055-943-0160)에서한옥민박을 체험할 수 있다. 금원산자연휴양림(055-940-8700)에서도 숙박이 가능하다. 거창한우가유명하다. 거창읍내에 원동갈비찜(055-942-1850), 감악산한우촌(055-942-6870) 등의 식당이 있다. 추어탕이나 어탕국수가 유명하다. 거창추어탕(055-943-0302),구구식당(055-942-7496)에서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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