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주동식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가 떴나 보다. 유족 중 몇 사람이나 여기 참여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 글은 언론에 주로 노출된 이지한 씨 부모의 발언을 근거로 작성하는 것이다. 즉, 이지한 씨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인 셈이다. 경칭과 경어 모두 생략한다.

유족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한다. 윤 대통령은 국가애도기간에 5일 연속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이 정도로 진정성을 표시한 사례가 없다. 게다가 윤 대통령은 이 사고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거듭 밝혔다.

이걸로도 부족하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여야 ‘진정성’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 차라리 유족들이 대통령의 사과문을 작성해서 ‘이렇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진정성처럼 악용되는 개념이 드물다. 진정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 단어는 애초에 합의의 결렬을 원하는 측에서 주로 동원하는 경향이 있다.

대통령 사과에 주어가 없다느니 주체가 없다느니 따지는 건 정말 가관이다. 사과에 형식성을 갖추라는 건데, 형식성과 진정성은 정반대의 가치다. 도대체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게 형식성인가 아니면 진정성인가? 이걸 보면서 유족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심증이 생긴다. 혹시 민주당이나 민변이 코칭하는 대로 따라가다보니 헷갈린 것 아닌지 묻고 싶어진다.

유족들은 또 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밝히라고 요구했는데, 이건 유족들의 행동과 모순되는 요구다. 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밝히려면 사고 원인에 대한 예단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태원 유족들은 대통령 사과에 이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도 요구하고 있다. 이건 유족들이 나서서 사고 원인을 미리 예단한 결과 아닌가?

유족들이 정말 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밝히기를 원한다면 지금처럼 행동하면 안된다. 침묵을 지키고, 국정조사 결과를 차분하게 기다려야 한다. 여야는 사고 원인을 밝히는 국정조사에 합의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합의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이상민 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키면서 국정조사 실현이 불투명해졌다. 그렇다면 유족들은 먼저 민주당의 섣부른 행동을 비판하고 이들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게 맞다. 그런데 왜 민주당에는 꿀먹은 벙어리인가?

유족들에게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가 왜 그리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정말 사고 책임을 따진다면 사과 요구는 문재인 씨에게 해야 한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비극의 가장 큰 책임은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에게 있다. 사고 당시 이 전 서장의 대처는 미흡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사고가 커지도록 일부러 방치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지경이다.

대통령 퇴임 직전 이임재를 용산서장에 내리꽂은 사람이 문재인 씨다. 그렇다면 사과는 문재인 씨에게 요구하는 게 맞지 않나? 이게 상식이다. 유족들은 왜 이런 상식을 무시하는지, 상식적으로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족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에게야 이 사고가 가장 크게 여겨지겠지만 비슷한 사건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매일같이 발생한다. 그런 사고마다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사과해야 하나?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요구하는 유일한 차별성은 비극의 규모가 컸다는 것 아닌가? 대한민국에는 좀더 큰 비극이 발생하기를 학수고대하는 세력이 있다. 그 자들에게 먹이를 주지 않았으면 한다.

그만하자. 누구 말마따나 나라 위해 일하다가 희생당한 것도 아니잖은가? 천안함 전몰장병의 유족들도 이렇게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이 나라는 어떻게 된 게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보다 쾌락을 위해 놀러갔다가 죽은 사람들 쪽의 목소리가 더 크다. 마지막 문장은 이태원 유족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혼잣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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