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1954~ )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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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驛舍)는 문학작품에서 단골로 등장한다. 그곳은 사람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인생역정의 공간이다. 대합실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영하의 날씨 톱밥난로처럼 따뜻하다.

그런데 ‘사평역’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평역(沙平驛)은 시인이 지어낸 역 이름이다. 이 시가 창작되던 1980년대만 하더라도 문학작품에 지명을 지어내는 게 유행이었다. 소설가 임철우는 이 시에 감명을 받아 같은 제목으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 실제 지명의 익명화(匿名化)는 한국단편문학의 고전이 된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영향이 컸다. 나중에 김승옥은 무진을 순천이라 증언했는데, 이처럼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일을 밝힌 것은 지자체들이 무진이 자기네 고장이라 서로 우겼기 때문이다.

시인이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사평역은 짐작컨대 경전선이 지나가는 남광주역으로 보인다. 오늘날은 실제 지명을 쓰는 게 추세다. 지자체는 문화가 곧 경쟁력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작가나 시인들도 거기에 호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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