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하순 <신영복을 존경하세요?>이 출간됐다. /넥스테이지
 

지난달 하순 <신영복을 존경하세요?>가 출간됐다. 통일운동가·국가정보기관·학자·청년의 시각에서 신영복(194~2016)을 연구 분석한 책이다. 국정원 원훈석(院勳石) 신영복 글씨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계기로 이 책을 낳은 연구모임이 만들어졌다. 국정원 원훈은 문재인 정부 때 수십년 만에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대체됐다. 신영복체로 쓰인 이 문구 속의 ‘국가’가 대한민국이라고 보긴 어렵다. 안보를 위해 反국가적 행위를 색출하는 게 주 임무인 국정원 입구에 평생 反대한민국을 추구하던 인물의 필체가 자리잡았던 것이다.

저자의 한 사람인 민경우 대안연대 대표 말을 빌면, "21세기 대한민국에 통일혁명당(통혁당) 장기수 신영복의 꿈이 흐른다"는 현실의 상징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절정을 향하기 시작한 ‘신영복 신드롬’에 대해 민 대표는 이른바 386(현 586) 세대의 정체성 문제로 설명한다. "나이를 먹고 사회에 진출해도 과거의 신념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운동권들 중 일부가 신영복을 빌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던 것 같다. 신영복은 은은한 수사와 인문학을 실어 적절히 이에 부응했다."

신영복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다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수로 복역하던 중 1988년 20년만에 전향서를 쓰고 사면, 출소했다. 북에서 이들을 구하러 공작선을 남파했을 정도의 사건이라 무기징역은 가벼운 처벌에 속할 정도였다. 공안사건 판결이 몇십년 만에 뒤집어지는 일이 흔해진 세상이지만 신영복은 재심을 청구한 바 없다. 오늘날 관점이나 법리로도 이론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신의 과거 사상 및 행적을 반성·회고한 적도 없다.

신영복은 우리사회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달성한 직후 올림픽을 치른 해 사면됐다. 이후 성공회대 교수, 문필가·강연자로 명성을 얻었고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고매한 언어로 고전을 해설하며 잔잔한 어조로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설파하다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일성체제 하에서 이론가 타입의 지식인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박헌영처럼 비참한 말로를 맞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함께 법정에 섰던 사람들 가운데 사형당한 후 평양 거리에 이름을 남긴 김종태, 사형 전 ‘혁명운동’에 대한 깊은 후회를 책으로 남겨 북한과 그 지지세력으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힌 김질락 등에 비하면 복되고 우아한 삶이었다.

베트남 패망 당시 억류된 우리 외교관 세 명의 귀국을 댓가로 북한이 집요하게 요구한 게 통혁당 관련자들의 북송이었다. 특히 신영복에 대해 김일성이 유독 미련을 보였다고 한다. 훗날 신영복 스스로 밝힌 바를 요약하면 ‘전향하지 않은 신념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전향서’를 썼다. 20년 수감생활 동안 그의 이념은 현실과 괴리돼 박제됐으며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가다듬어진다. 주옥 같은 말말말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머리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공장노동자로 위장취업했던 고학력 운동가들에겐 이상적 위로이자 정당성 부여다. 지식인으로서 큰 영예를 누리면서 지식인의 효용과 존재의미를 부정하는, 자가당착적 논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역대 공안사건 관련자를 ‘민주투사’나 ‘조작 피해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80~90년대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저자들의 증언은 신영복이 왜 그들의 ‘스승’ ‘대부’일 수밖에 없었는지, 통혁당 유산이 어떤 식으로 우리사회에 살아있는지 알려준다. 문 전 대통령처럼 ‘신영복을 존경한다’는 사람들이 ‘김일성주의’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민경우 대안연대 상임대표. <신영복을 존경하세요?> 저자의 한 사람이자 신영복연구모임의 좌장이다. /미래대안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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