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남공작 70년사] 박정희 포섭 임무 4인의 공작원

黃, 박정희와 대구사범학교 사제 지간·형 박상희 친구 등 인연
침투 후 박 대통령 형수 조귀분 포섭해 직접 접촉 등 임무 받아
임진강 통해 서울로...훗날 중앙대 총장 된 김민하 접선·은신

처형되기 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황태성(왼쪽 위)과 박정희의 형 박상희 생전 모습(위 사진 오른쪽). 아래 사진은 황태성을 숨겨준 혐의로 3년여를 복역한 김민하 전 중앙대 총장이 평양에서 열린 제1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는 모습.
처형되기 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황태성(왼쪽 위)과 박정희의 형 박상희 생전 모습(위 사진 오른쪽). 아래 사진은 황태성을 숨겨준 혐의로 3년여를 복역한 김민하 전 중앙대 총장이 평양에서 열린 제1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는 모습.

첫 번째 파견공작원 후보로 선정된 인물은 황태성이었다. 1906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한 황태성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공산주의 활동을 해왔고, 이런 경력으로 8.15 광복 후에는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46년 10월 1일에 일어난 ‘대구폭동사건’을 주도하는 등 공산당활동에 헌신하다가 활동이 여의치 않자 북한으로 입북한 후 기존의 활동공로를 인정받아 1948년 8월 25일 진행된 제1기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6.25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고위급 간부인 내각 상업성 부상(차관) 겸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황태성은 1961년 6월 하순 경 당시 노동당 부위원장 겸 대남공작 총책인 이효순의 소환을 받고 대남공작원으로 파견하는데 동의하였던 것이다.

황태성과 박정희 장군과의 연고관계를 보면 그가 일제 때 대구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당시 박정희 장군이 사범학교에 다닌 관계로 둘 사이는 사제지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족적으로도 인척간이었다. 특히 황태성은 박정희 장군이 가장 존경했다는 친형 박상회와는 조선공산당에서 같이 활동한 친구 사이였다. 친구 박상희에게 부인인 조귀분을 소개한 이가 황태성이다.

두 번째 파견공작원후보로 선정된 인물은 경북 선산출신의 박모였다. 그는 대구농림학교를 나온 후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8.15 광복 이후 귀국해 국군준비대를 거쳐 박정희 장군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2기로 임관한 동기생이며 사관학교 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1949년 여름 군대내 좌익세력을 숙청할 때 남로당 프락치로 적발되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25 전쟁을 틈타 형무소를 탈출해 북한으로 도주했다. 박 모는 북한에 들어가서는 당학교와 송도정치대학을 졸업하고 철도성 정치국 부부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박정희 장군과는 같은 박씨 일가친척 관계에다 고향도 같은 경북 선산이고 육사 동기라는 연고가 있었다.

세 번째 적임자로 선정된 공작원 후보는 박정희 장군의 대구사범학교 시절 2~3년 그를 직접 가르친 김모였다. 김모는 6.25 전쟁 때 북한으로 들어가 대학교수를 역임하고 있었다.

네 번째 후보는 박정희 장군과 육사 동기생으로 군대 내에서도 같은 좌익라인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이모였다. 그는 1948년 군에서 나온 뒤 사회에서 좌익활동을 하다 체포되었으나 6.25 전쟁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뒤 북한으로 들어가 군의 부군수급(군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간부로 일하고 있었다.

중앙당 연락부에서는 1961년 6월 말 위에서 언급한 파견공작원 후보 4명을 소환하여 관할 초대소 4곳에 각각 개별적으로 입소시켰다. 이들 4명에 대한 인사가 속전속결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휴전 이후부터 북한이 남한출신들을 대남공작에 활용하기 위해 월북자들을 전수조사해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북한지도부의 적화통일 야욕이 확고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첫 번째로 남파된 황태성

파견공작원 후보 4명을 선발한 공작지도부에서는 이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공작여건과 환경, 자질과 능력, 연고관계, 직급 및 상대에게 비춰지는 지위와 신뢰관계 여부 등 여러 측면에서 장단점을 냉정하게 비교 평가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런 다음 책임간부들이 모여 4명에 대한 평가자료를 가지고 최종적으로 누구를 서울에 파견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결정하는 토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책임간부들과 4명의 파견 공작원후보들과의 친분관계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당시 중앙당 연락부장이던 어윤갑은 파견공작원 후보 4명의 경력과 장단점 등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자료를 가지고 김일성에게 직접 찾아가 보고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이들 4명 가운데 김일성이 직접 아는 사람은 황태성뿐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황태성은 내각 상업성 부상(차관)인데다 상업성이 주민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각수상인 김일성과 접촉할 기회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연과 내각 부상으로서의 직급은 김일성이 황태성을 최종 협상대표, 파견공작원으로 낙점하는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일단 여러 측면에서 장점이 많은 황태성을 먼저 파견하고 김모를 곧이어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황태성과 김모가 양쪽에서 공략하면 박정희도 어쩔 수 없이 평화통일 협상에 나오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김일성과 북한지도부의 판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상대적으로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박모ㆍ이모는 파견을 보류하기로 한 가운데, 황태성과 김모의 공작결과에 따라 파견여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 최고지도자에 대한 공작은 단기공작 형태로 추진하되 파견공작원이 극비밀리에 엄격하게 차단 봉쇄된 여건에서 최고위층을 단독으로 만나 담판을 짓는 비합법 단독공작 방식을 적용하기로 하였다.

북한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먼저 황태성은 실제 서울에 침투하는 1961년 8월 말까지 약 2개월 동안 공작교육과 침투훈련을 속성으로 진행하였다. 침투전술에 따른 수영 및 잠수훈련과 무전기 작동 및 암호해독 등 통신훈련, 공작대상 접촉 및 설득 방법 등 침투와 공작임무 수행에 필요한 종목 위주로 교육과 훈련을 진행하는 한편 공작전술 구상 및 토의도 병행하였다.

당시 황태성이 노동당 대남사업국장 이효순으로부터 받은 임무는 네가지 였다. 첫째, 침투 후 박정희의 형수인 조귀분을 포섭하고 그를 통해 박정희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후 중앙당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을 것. 
둘째, 첫 번째 방법이 어려우면 광복 직후 활동무대였던 경북지역에 가서 대구시를 중심으로 지하당조직을 구축하고 신분의 합법을 쟁취할 것

셋째, 당적 활동은 5.16 혁명 직후의 사회적 혼란을 이용하여 정치 사회적 혼란을 조성할 것이며, 4.19의 재판(再版)과 같은 혼란을 조성할 것
넷째, 한국의 전체 국민들이 평화통일을 제창하도록 평화통일 공세를 취하고 미군철수를 위한 반미사상을 고취시킬 것 등이었다.

이 같은 공작임무를 받고 침투준비를 마친 황태성은 1961년 8월 말 개성연락소 전투원들의 안내와 도움을 받으며 잠수에 의한 수중침투 방식으로 임진강을 도강해 문산지역으로 침투했다. 그런 다음 도보로 서울 우이동 계선까지 무사히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안내조와 함께 무인포스트 장소를 설정하고 그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낸 황태성은 9월 1일 북한 공작지도부에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으며 계획대로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무전보고를 했다. 그런 다음 산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고 북한에서 토의한 공작계획대로 서울 영등포구 흑석동(현재는 동작구 흑석동)으로 향했다.

같은 경북 상주 청리면 출신이자 인척관계인 중앙대학교 강사 김민하(후에 중앙대학교 총장 및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역임)를 접선하기 위해서였다. 김민하를 만난 황태성은 자신이 받은 공작임무와 함께 북한에 살고 있는 그의 부친과 형이 보낸 편지 및 소식을 전해주면서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중앙대학교 강사로 재직 중인 협조자 김민하의 부친과 형은 6.25 전쟁 시기 북한으로 들어가 부친은 군(郡)인민위원회 부위원장(부군수급)으로, 형은 도(道)인민위원회 지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황태성은 서울에 침투할 때 그들이 직접 쓴 편지를 가지고 김민하를 찾아온 것이다.

편지에는 편지전달자(황태성)의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해주고 그의 활동(공작)을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을 강조하는 내용과 함께 황태성의 신변이 노출되거나 검거될 경우 발생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적시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황태성을 잘 보호해주고 도와줄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김민하는 부친과 형이 편지를 통해 부탁한 것도 있었지만 황태성의 여동생 황경임의 딸인 임미정과 김민하의 친구이자 처남인 권상능이 부부간이었다. 결과적으로 황태성과 김민하는 외척간이어서 황태성을 자신의 집에 은신시켜주고 잘 보호해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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