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26)
운동권 '한대련'과 비운동권 '전총모'의 공존과 대진연 결성

소셜네트워크 영향력 커지면서 시민단체·유명인·정치인들에 종속
정치화 비판에 직면...'비운동권 열풍' 속 대안 세력 '전총모' 등장
박근혜 탄핵 거치면서 종북 주사파 계열 '대진연'이 학생운동 주도

2002년 12월 14일 저녁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미선양을 추모하는 집회와 '주권회복의 날 1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에 촛불을 든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2002년 12월 14일 저녁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미선양을 추모하는 집회와 '주권회복의 날 1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에 촛불을 든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한대련은 2002년 하반기와 연말에 진행된 미선이 효순이 촛불집회가 끝난 뒤 등장했다. 이적단체로 몰린 한총련 대신에 새로운 대학생연합조직 건설을 논의하면서 구체화 되었다. 2002년 12월 22일 연세대 학생회관에서 동아대 총학생회장 문옥주를 비롯해 고려대, 연세대, 경희대, 단국대 등 17개 대학 총학생회장이 참석했다.

그 외 60여 개 대학의 운동권 학생들이 참관했다. 이 회의에는 한총련 소속 총학생회장뿐만 아니라, 한총련의 좌파 민족주의적 성향(자주파, NL)에 비판적이었던 평등파(PD) 학생들과 반자본주의 성향의 학생들도 참여했다. 회의에서는 주로 ‘학생운동의 총단결’과 ‘새로운 단일 학생 조직 건설’을 논의했다.

이러한 논의가 진행된 배경에는 2002년 말부터 수 개 월간 계속된 ‘미선 효순 추모 촛불시위’가 있었다. 한대련 결성 논의에 참석한 대학생들의 입장은 당시 발표된 ‘호소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회의가 끝난 후 ‘전국 300만 대학생 여러분께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선도해 온 대학생의 역할이 여전하다는 것은 최근 일어난 새로운 반미운동을 통해서도 명백히 알 수 있다"며, "이 역동적인 에너지는 인터넷 공간에서 네티즌 여론으로 나타났고, 광화문에서 촛불의 바다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또, 그들은 "공통성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서로의 차이는 존중하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전체 학생운동의 힘을 길러야 할 때"라고 밝혔다. 그들이 제시한 ‘단결’의 사례로 2003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를 자주파 계열 학생들과 평등파 계열 학생들이 공동으로 운영한 예를 들고 있다.

당시 김민수 한대련 추진위 집행위원장은 "한대련은 한총련과 다른 독자적인 조직이고, 독자적인 건설 과정을 밟고 있으며, 한총련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2003년만 해도 한총련이 학생운동의 주류였고, 투쟁으로 ‘이적단체’ 문제를 돌파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의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한총련 소속으로 총학생회장과 단과대 학생회장에 당선만 되어도 곧바로 이적단체 성원이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대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총련에 애정이 없는 비운동권, 비NL계열 총학생회는 당선되자마자 한총련 탈퇴를 추진했다.

그렇게 한총련을 탈퇴하거나 활동을 하지 않는 총학생회가 모여 2005년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 후 광우병 파동 촛불시위와 오세훈 시장 사퇴와 박원순 시장 선거운동으로 활성화된 한대련은 2011년에는 고려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등 전국 20여 개 총학생회와 80여 개 대학의 단과대 학생회가 참여하며 가장 큰 대학생조직이 되었다.

한총련은 2008년부터 의장을 선출하지 못한 채 투쟁본부 체제로 운영되었다. 또 2010년이 넘어오면서는 일부 대학에서 활동하는 사람 몇 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2009년부터 재야연합체인 ‘한국진보연대’의 대학생단체 상임위원 자리도 한총련에서 한대련으로 넘어갔다. 한총련은 ‘6·15실천연대의 학생위원회’ 등으로 활동했다.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을 대체한 한대련

대학생 운동조직의 통합을 표방한 한대련이었지만, 주된 세력은 한총련을 구성하고 있던 ‘NL주사파’가 주축을 이뤘다. 창립선언문에서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밝힌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대련은 반값 등록금 촛불시위처럼 대중적 운동을 중심에 두었던 점에서 한총련과 차이를 보였다. 조직 강령에서도 ‘교육의 공공성 강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존권 보장’ 등을 ‘우리 민족끼리 평화통일’보다 먼저 제시하고 있다. 이는 반미주의를 맨 앞에 내건 한총련과 비교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대련이 중점을 둔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반값 아파트’에 착안한 ‘반값 등록금’ 투쟁이었다. 2012년 대선이 가까워지던 2011년 ‘반값 등록금’ 투쟁이 본격화됐다. 3~4월 경희대, 고려대, 이화여대, 인하대, KAIST 등 전국의 대학생들이 비상 학생총회를 열어 학교 당국에 등록금 동결, 비민주적 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5월 30일에는 서울대 법인화에 반대하는 서울대 학생들의 비상총회가 본관 점거로 이어졌다. 이 비상총회에는 2000여 명이 참석해 재학생의 10%(1650명)라는 정족수가 채워졌다. 6년 만에 열린 비상총회에서 서울대 학생들은 ‘법인설립준비위원회 해체를 위한 행동 개시’, ‘행정관 점거’라는 안건에 80%가 넘는 지지를 보냈다.

광화문에서도 대학생들의 촛불시위가 이어졌다. 한대련은 5월 29일부터 조건 없는 반값 등록금 이행을 외치며 기습 촛불시위를 벌였다. 시위 닷새째인 6월 2일부터는 시민들이 촛불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는 이명박 정부의 반값 등록금 공약 철회다.

전총모 3기 출범식이 2013년 7월 25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리고 있다.
전총모 3기 출범식이 2013년 7월 25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리고 있다.

2011년에 대학생들의 투쟁이 예전보다 격화됐는가에 대해선 2010년 오세훈 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시장에서 사퇴하면서 무상급식 등 복지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생운동 단체보다 유명인들을 내세운 시민단체들의 소셜네트워크 영향력이 컸다는 점에서 광우병 촛불시위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이렇듯 한대련에 들어오면서 일반 학생운동은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유명인들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심해지고, 한총련 등 조직적인 NL 주사파의 영향력은 현격히 약화됐다. 즉, 소셜네트워크의 영향력으로 시민단체, 유명인, 정치인들에게 종속적인 존재가 되었다.

한대련은 학생 대중투쟁에 집중한 한총련과 달리 정치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대부분은 민주노동당에 가입했지만,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민주당에도 가입하였다. 그래서 한대련 총회에 이정희 민노당 대표가 참석하여 축사했다. 그러다 보니, 민주노동당 평등파에서는 한대련을 한총련의 후신, 이석기의 ‘경기동부그룹’ 계열로 여겨졌다.

한대련은 이름만 바꾼 한총련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점차 비운동권과 비NL계열의 총학생회가 탈퇴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더구나 2000년대 들어 대학생들 사이에 운동권에 대한 거부 정서가 퍼졌기에 노골적인 ‘반 운동권 선본’을 표방하고 총학생회 선거에 나서는 팀들이 많았다.

학생들, 학생운동 정치화 비판으로 비운동권 총학생회장 선호

2012년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가 ‘한대련(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탈퇴’를 결의했다. 고대 총학은 2009년 한대련에 가입한 뒤, 한대련 서울지부인 서울대련 소속으로 활동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해 말 ‘한대련 탈퇴’를 제1 공약으로 내세웠던 학생들이 2012년 총학생회에 당선됐다. 고대 총학은 10일부터 사흘간 고대생들을 대상으로 정책투표를 열어 한대련 탈퇴를 결정했다.

비운동권 학생들이 총학생회에 당선된 것은 고대만이 아니었다. 한국외대 서울캠퍼스도 2012년에 한대련을 탈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총련, 한대련 탈퇴는 개별 대학 차원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고대 총학의 한대련 탈퇴는 9월 중으로 예정된 비운동권 총학생회 연합조직인 ‘전국총학생회모임(전총모)’의 출범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전총모’ 소속인 박종찬 고려대 총학생회장(31)은 "35개 대학 총학생회장이 모여 전총모의 방향에 대해 논의했고, 총 50개 대학이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한대련만이 대학생을 대표하는 유일한 연대조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한총련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비운동권 열풍’이 불었다. 일부 비운동권 학생들은 뉴라이트 전국연합 등 보수단체의 지원을 받은 사례도 나타났고, 2002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손창일은 2004년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 신청을 하기도 했다.

전총모는 공식적으로 ‘한대련을 대체할 대안 연대체’를 내걸었다. 일부 운동권 학생들은 "전총모의 뒤에 보수세력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전총모를 ‘보수주의 학생운동 조직’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이론적 지식이나 조직적 능력에서 ‘전총모’는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전총모의 행적은 ‘반값 등록금’을 주장하는 한대련과 다르지 않았다. 8월 전총모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만나 "등록금 부담을 반으로 낮추겠다"는 답변을 들었고,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와도 반값 등록금 공청회를 열겠다고 했다. 그만큼 현안 중심이었지, 이론적이고 조직적인 뒷받침은 없었다.

이에 전총모의 박 회장은 "전총모는 기성정치 세력이나 이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은 학생들이 모인 연석회의"라며, "대학생들이 사회적 목소리를 내야 할 사안이 있다면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거리 집회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대련이 ‘반값 등록금’ 이슈로 폭발적인 관심을 받긴 했지만, 그 활동이 총학생회장 당선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왜냐하면, 한대련이 대중적인 이슈에 투쟁의 초점을 맞춘 것은 사실이지만, 시민단체와 유명인을 내세워 관심을 끄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대련도 학생운동을 정치화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러한 비판이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의 당선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전총모’의 결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한대련의 시기에 학생운동은 운동권(한대련)과 비운동권(전총모)의 대결, 그리고 NL 주사파의 한총련이 공존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시위를 거치며 NL주사파의 언더그룹인 한총련과 오픈그룹인 한대련이 통합된 종북 주사파 계열인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것은 문재인 정권의 수립으로 ‘언더’와 ‘오픈’을 분리해서 운영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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