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근
황근

요즘은 가짜뉴스라는 용어를 주로 쓰지만 1980~90년대까지는 유언비어(流言蜚語)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 원래 의미는 "아무 근거 없이 널리 퍼진 소문"이란 뜻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퍼뜨린 허위 사실"이란 뜻으로 더 많이 알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초반 신군부가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유언비어는 정권이 감추고 있던 사실을 폭로하는 긍정적 의미로 인식되기도 했다.

엄격하게 보면 유언비어와 가짜뉴스는 큰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유언비어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은밀히 전파되지만, 가짜뉴스는 언론사가 만든 뉴스로 위장해 온라인에서 공개적으로 확산된다는 것이다. 또한 유언비어는 근거 없는 것들이 많지만 간혹 사실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가짜뉴스는 거의 대부분 상업적·정치적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유언비어나 가짜뉴스 모두 그 파급력은 엄청나다. 정치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도 하고, 많은 클릭 수를 끌어모아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기도 한다. 완전한 허위 사실로 확인된 ‘대통령 청담동 술판’을 폭로했던 인터넷 매체 ‘더 탐사’가 엄청난 경제적 수익을 올렸다는 것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인터넷 매체의 가장 좋은 수익모델은 극단적인 당파성을 가지고 가짜뉴스를 마구 퍼뜨리는 것이다. 투철한 정치적 신념으로 무장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자기 진영 사람들이 열광하는 팬덤 메시지를 확산시키는 이른바 ‘정치 비즈니스’다. 실제로 김어준을 비롯한 좌파의 셀럽들은 거의 모두 그렇게 성공해 여기까지 올라 온 사람들이다.

세계적으로 가짜뉴스라는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정치인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언론을 공격하기 위해 가짜뉴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한마디로 정치인에게 가짜뉴스란 자신에게 불리한 뉴스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전 정권 핵심 인사들도 자신들의 비리와 위선을 공격하고, 정책 실패를 비판하는 언론보도들을 모두 가짜뉴스라고 연신 공격했었다.

그런 이유로, 제대로 지켜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국에서는 가짜뉴스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한 적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짜뉴스라는 용어를 쓰지 말자는 주장들이 종종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가짜뉴스의 숙주가 바로 정치권이기 때문이다. 특히 진영논리에 매몰돼 합리적 판단 능력이 거세된 극단적 지지층에 발목 잡혀있는 한국 정치 문화에서, 진짜 뉴스가 들어설 틈은 거의 없다.

이렇게 가짜뉴스가 창궐하는 근본 원인은, 각 진영에 속한 정치인이나 지지자들 모두가 상대 진영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심각한 집단 난독증(難讀症)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입시에 초점이 맞춰져 온 우리 국어교육이 쓰기와 말하기에만 열을 쏟고 듣기훈련을 소홀히 해 온 탓도 있을 것이다. 방송 토론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토론회를 보다 보면 상대방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자기 생각만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정치인들에게서 그런 경우가 더 많다. 개선되기는커녕 도리어 퇴화되고 있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은 그런 듣기 능력이 결여된 소통 능력 부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이런 난독증이 정치권뿐만 아니라 언론에도 만연되어 있다는 점이다. 통상 언론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개방된 사회에서는 유언비어나 가짜뉴스가 성행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성 언론들은 도리어 더 앞장서서 가짜뉴스를 생산·확산시키고 있다. 특히 좌파 정권과 결탁해 충성스러운 정치 도구가 되어버린 공영방송의 몰락은 민주주의 근간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수준에 와있다. 결국은 눈·귀를 막고 자발적으로 중증 난독증에 걸려 가짜뉴스의 숙주가 된 공영방송들이 문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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