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제무르 <프랑스의 자살>이 우리말로 번역됐다(틈새책방, 788쪽). 2014년 프랑스에서 출간돼 반향을 부르며 50만 부가 팔린 책이다. 저자 제무르를 2022년 프랑스 대통령선거 후보로 출마하게 만든 발판이 되기도 했다. 첫 단락부터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프랑스는 병자(病者)다." 부강한 자유민주공화국 프랑스가 어떻게 스스로 쇠퇴를 거듭해 국가적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 기술했다. 전 세계인의 동경과 부러움을 샀던 부유한 문화대국 프랑스는 옛말이 된 듯하다.
 
"68세대가 만든 3부작 조롱·해체·파괴는 가족·국민·노동·국가·학교 같은 전통적 체계의 근간을 무너뜨렸다." 공동체보다 개인주의를, 프랑스 자국 중심보다 세계화와 보편적 휴머니즘을 추구한 결과가 오늘날의 프랑스다. 제무르는 기존 공동체를 무너뜨려 그 자리를 타락한 개인주의로 채웠으며, 문화적 다양성과 소수자 보호를 외치는 보편적 휴머니즘이 무분별한 이민 허용을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이슬람화’를 그는 우려한다. 그리스·로마 및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프랑스의 문화에 전혀 동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질성을 키우며 세를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무르는 이 모든 게 68세대가 좌파의 이상을 내세우며 수십년 국가를 주도해 온 결과로 본다. 68세대의 문제점은 한국사회의 이른바 586과 대비해 이해하면 대부분 들어 맞는다. 1960년대 후반 동시대 구미 선진국(일본 포함)의 청년층에게 광범위한 ‘운동권 마인드’를 심은 이른바 68운동의 진원지가 프랑스였다. 제무르에 따르면, 오늘날 현실은 자유·세계화 구호 아래 가족·교회·국가 등 공동체를 와해시킨 좌파의 책임, 이에 동조하면서 사리사욕을 챙긴 우파의 무책임이 근본 배경이다. 엘리트들이 ‘이상’ ‘정의’라며 추구한 것들이 사실은 나라를 좀먹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거론된 모든 문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민주화 이래, 특히 지난 몇년 사실상 빠르게 프랑스의 궤적을 밟으며 달려 온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 범 민주당계에서 집요하게 추진해 온 ‘차별금지법’이나 ‘건강가족기본법 개정안’ 등이 내세운 취지와 달리 어떤 부작용을 낳을지에 관해 프랑스는 대선배인 셈이다. 앞으로 정비해야 할 ‘이민법’에도 커다란 참조가 될 것이다.
 
제무르는 195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알제리계 유대인이다. 파리정치대학(시앙스 포)를 졸업하고, 프랑스 보수지 ‘르 피가로’를 등 유명 매체와 TV 시사프로그램에서 대표적인 우파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이슬람 이민자들과 LGBT를 향한 직설적 언사가 논란을 부르기도 했으나, ‘극우 인사’로 치부하기엔 현실 진단 및 비전이 탄탄하고 논리적이며 설득력 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화제의 저서 <프랑스의 자살>은 우파 지식인 제무르의 절절한 나라사랑과 걱정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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