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스키외 삼권분립 알고는 있나! 닥치고 혁명 중이니..
몽테스키외 삼권분립 알고는 있나! 닥치고 혁명 중이니..
  • 강량 주필, 정치학박사
  • 승인 2020.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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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국가서 통치는 갈등의 연속, 그 속에 국민의 자유도 존재

검찰의 정치적 중립, 상하문제가 아닌 통치의 기능분리 행위

20세기 공산주의가 망한 요인을 한가지로 요약하면, 이는 ‘인간본성’ (Human Nature)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이성’ (Reason)과 ‘감성’ (Passion)으로 이뤄진 존재이기 때문에, 과학에 기반을 둔 이성적 재단으로, 다시 말해 사회발전현상을 마치 수학방정식 풀이하듯이, 역사발전의 귀결사안으로 맞아 떨어지게 하려는 식의 의도 자체가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물론과 무신론에 입각한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라는 상호 대립되는 관념 사이에, 인간의 ‘이익’ (Interest) 개념을 넣어서, 통치형태를 풀어내었던, 프랑스 계몽주의철학자 몽테스키외 (La Brede de Montesquieu)의 ‘법의 정신’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몽테스키외

몽테스키외가 주창한 소위 입법, 사법, 행정간 삼권분립의 의미에는 삼권의 기계적인 분할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삼권사이에서도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이성적인 이익' (Reasonable Interest)개념과 ‘감성적인 이익’ (Passionate Interest)개념을 상호 존중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철학적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삼권분립은 기능의 완전한 ‘분할’ (Separation)이 아니고, 상호 보완하고 협력할 수 있는 권력의 ‘분리’ (Division) 정도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만약 삼권이 완전히 분할되어있어서 한쪽이 다른 쪽을 서로 넘보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벽을 쳐서 견제를 해 댄다면, 삼권의 모든 기능은 곧 바로 멈춰서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 삼권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통치행위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데, 바로 그렇게 만드는 ‘힘의 원천’은 동시대의 국민적 의사가 그때그때 반영되는 ‘시민사회’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다.

국민들의 시대적 변화와 이들의 이익개념을 대변하는 자율적인 시민사회가 변화하면, 그 변화를 입법행위를 통해서 반영하고, 이를 행정부와 사법부가 협력해서 서로 타당한 ‘기능적 포지션’을 자동적으로 찾아 가게끔,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더 중요한 점은 삼권분립만이 권력의 기능적 분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삼권 내에서도 각각의 하부구조에서 권력의 분할이 아닌, 권력의 기능적 분리가 존재하며, 이를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행정부 내에서 소위 권력부처로 분리될 수 있는 국정원, 국방부, 감사원, 검찰 등은 행정부 내에서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지휘, 감독을 받지만, ‘권력기능의 분리’는 철저히 보장받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정치적 중립이 보장되지 않게 되면, 대통령이라는 국가최고 권력자가 자기 마음대로 국가를 통치하게 되는 독재의 결과를 도출하기 때문이다.

삼권이 분리되어 있고, 또 각 권력 하부구조의 기능이 분리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는 ‘헌법정신’에 기인한다. 국민의 기본권인 언론, 출판, 결사, 종교, 양심의 자유를 비롯한, ‘이동의 자유’ (Freedom of Movement)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바로 사회주의적 전체주의국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매일같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추미애법무장관의 윤석열검찰총장에 대한 겁박과정에서, 윤총장의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상하관계가 아니다’는 말처럼, 서로 행정부서 내에서 완전히 기능적으로 상호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헌법정신에 부응한다’는 윤총장의 예기와 함께, 애초에 삼권분립과 그 하부구조의 기능들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취하도록 분리되어 있다는 ‘법의 정신’ 예기도 덧 붙여져야 했었다는 점이다.

그랬다면 정치적 중립의 중요성이라는 말과 함께, 윤총장이 더욱 완벽한 ‘법의 정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찬사를 더욱 많이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마음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하기야 법의 정신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고 있는 윤총장을 잘라내는 데에만 급급해, 매일 궤변과 억측을 뿜어내고 있는 추장관과 마냥 권력에 취해서 국민을 겁박하고 대한민국을 열심히 파괴하고 있는 文정권위정자들에게 이런 고상한 예기는 정말 ‘소귀에 경 읽기’와도 같은 전혀 의미 없는 주장이 될 수밖에 없다.

레이몽 아롱
레이몽 아롱

‘지식인의 아편’으로 유명한 프랑스철학자 레이몽 아롱 (Raymond Aron)이 1977년 방한 한 후, 박정희대통령의 경제발전노력을 호평만 하고, 다른 정치적 자유와 인권 박해문제는 언급하지 않자, 한국의 좌파들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악평과 비난을 쏟아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아롱은 경제적 수준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를 가져오기 때문에, 한국의 GDP가 5천 달러가 넘어서고, 중산층이 늘어나면, 반드시 민주주의로 가게 되어 있다고 봤기 때문에, 그런 과정에서의 박정희대통령 노력이 가상했기에, 다른 비평을 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던 바 있다.

그리고 1980년 3김씨로 대변되었던, 소위 ‘서울의 봄’ 상황에 대해서도 아롱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은 민주화가 아주 오래 걸린다는 것을 아는데, 한국의 정치지도자와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너무 쉽게 본다고 일갈하며, 한국 민주주의는 아직도 멀어도 한참 멀었다고 논평했던 바 있다.

아롱의 지적대로 한국은 소위 문민정권시대를 연 이후, 박근혜정권에서 1인당 GDP 3만 달러와 인구 5천만명이 넘는 세계 7번째의 선진대열에 들어갔지만, 작금의 文정권하에서 정치는 기가 막히게도 조지 오웰 (George Orwell)의 저서 ‘1984’식의 전체주의적 인민독재로 흘러가고 있다.

‘사회주의는 소외되고 자격지심으로 가득 찬 당대의 지식인들을 곧 잘 유혹 한다’는 아롱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대한민국은 운동권출신의 586세대로의 기득권전환이 완전히 이루어졌으며, 이들의 무능과 무지에 입각한 ‘몽상적 혁명의지’는 건국 72년 동안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기적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다.

과거 1968년 프랑스좌파혁명을 주도했던 사회주의자들은 70년대 후반에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난후에, ‘거침없고, 활기차고, 열성적인 사르트르 (Jean-Paul Sartre)와 함께 틀리는 것이, 침울하고 완고한 아롱과 맞는 것보다 훨씬 좋다’라는 궤변을 남겼던바 있다.

그래도 프랑스좌파사회는 실존주의의 거두였던 사르트르라는 최상의 아름다운 사기꾼이라도 있었지만, 탐욕과 무지의 악령들로 들끓고 있는 대한민국은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정말 앞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대한민국 파괴악행이 덧없는 ‘한편의 정치드라마’로 끝난 후에, 이들은 과연 어떤 말을 남길 수 있을까? 몹시 궁금하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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