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제(聖誕祭)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1926~2017)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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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제(聖誕祭)’는 크리스마스의 한자어이다. 제목을 크리스마스라 하지 않고 성탄제라 한 것은 시인의 출신이 전통문화의 고장 안동이라는 점과 상관관계가 있다. '성탄제’는 시인의 등단작이자 출세작이다.

눈 내리는 성탄절날 밤, 성탄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던 시인은 ‘불현듯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을 느낀다. 유년시절, 병든 자식을 살리기 위해 눈 덮인 산속을 헤치고 산수유 열매를 따오던 그날 밤 아버지의 모습. 성탄제가 의미하는 그리스도 정신과 아버지의 사랑은 결국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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