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볼 수 없는 민주주의의 부정, 사회적 아노미현상 확대시켜
차마 볼 수 없는 민주주의의 부정, 사회적 아노미현상 확대시켜
  • 강량 주필, 정치학 박사
  • 승인 2020.1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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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부조화’를 일부러 조장하는 文정권,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상식과 양식이 파괴된 세상, 종교단체가 나서야 하지 않겠나!

대한민국 73년 헌정사에서 이렇게 지독하게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분노와 원한’을 쌓이게 만드는 정권은 처음이다. 문제는 국민의 모범이 되어야 할 文정권위정자들의 위선, 기만, 사기, 거짓말로 인한 국민들의 ‘인지부조화’가 아노미현상과 함께, ‘자살’이라는 극단으로 반영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깊어져가는 분노와 그로 인한 원한은 자기성찰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스스로 극복하기 어려워진 상황은 아노미현상을 빚어, 모두를 적으로 인식하는 무차별적인 파괴행위로 나타나거나, 극단적인 자기파괴인 ‘자살’이라는 사회문제를 야기한다.

에밀 튀르켕

소위 ‘세계화’된 21세기 지구촌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고전적 사회학자는 프랑스사회학자 에밀 튀르켕 (Emile Durkheim)이다. 그는 프랑스혁명이후 전개되었던 극심한 안과 밖의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유대교 랍비 집안에서 태어나, 율법에 따른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에 회의를 갖고,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천명한 이후, 프랑스가 혁명의 후유증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70년의 세월 속에서, 소위 현대 ‘사회학’이란 학문적 영역을 최초로 개척한 철학자로 자리매김했다.

튀르켕은 ‘자살론’ (Le Suicide)으로 유명하다. ‘개인과 사회제도’는 분리될 수 없는 상호적 영향을 미치는데, 통합된 사회는 통합된 사회대로, 분열로 인해 억압과 규제가 심한 사회는 그런 사회대로, 극심한 ‘일탈’현상을 겪는 개인들을 ‘자살’로 유도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과 숙명적 자살 등, 사회과학적 통계를 사용해서 관념적 자살세계를 재단했던 튀르켕도 1차 세계대전에서 아들과 제자들이 줄줄이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1917년 방년 60세에 눈을 감는다.

파스칼 (Blaise Pascal)은 인간의 ‘전쟁행위’는 어처구니없게도 ‘죽음’을 보지 않으려는 무신론자들의 ‘공포’에 기인한, 소위 ‘기분풀이’로서의 파괴행위로 보았는데, 무신론자였던 튀르켕도 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소멸’이라는 실존적 충격이 그의 학문세계와는 무관하게 초월할 수 없었던 ‘죽음의 상처’가 되었다니, 한편으로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튀르켕은 자신보다 17년 일찍 사망했던 니체 (Friedrich Nietzsche)와 출신배경과 철학적 인식체계에서 적지 않은 동질성을 갖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성직자의 자제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무신론자였다.

프리드리히 니체 (1844~1900)

니체는 사적인 이해만 따지는 기독교에 크게 실망했다. '사람 신'인 예수가 보여준,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성찰은 없고, 무조건적인 신에 대한 복종만을 강조하면서, 무능력하게 타락해버린 기독교를 질타했다. 그래서 ‘용기’로 대변되는 ‘남성성’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죽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초인의 의지’를 강조했다.

공동체의 해체와 종교기능의 상실로 인한 인간의 자살동기를 분석했던 튀르켕도 결국 약한 인간의 의지와 이를 악용하는 제도적 모순과의 역학관계를 심도 있게 분석, 설명하고 있다.

의지보다는 타성에 젖어 무능할 수밖에 없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들’, 그래서 ‘자살의 유혹’에 빠져드는 인간들에게 ‘초인의 의지’를 갈구하고 있다.

입만 열면 정의, 평등, 공정, 평화 등을 강조하면서, 뒤돌아서서 온갖 위선과 사기, 부정과 부패를 일삼고, 이를 도구삼아,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文정권위정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튀르켕이 강조하는 사회적 일탈현상과 인지부조화로 인한 자살충동을, 마치 전염병처럼, 한국사회 전역에 의도적으로 퍼트리고 있는 것 같다.

거듭 반복되는 선전, 선동효과로 머릿속에 세뇌된 내용들을 지워버리기도 전에, 또 다른 차원의 세뇌공작이 연속된다면, 이 또한 양식과 상식을 가진 시민들이라면 정말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이성적 상식과 양식에 입각한 사회현상에 대한 분석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이는, 다시 말해, 상당한 ‘지적 고통’이 따르는 인지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고통과 어려움을 줄여주는 한 가지 방법은, 그냥 듣는 대로 주입된 이미지와 현상들을 생각 없이 믿어버리는 것이다.

가족, 종교단체, 시민공동체 등과 같이, 건전한 집단의식 속에서 개인의 존재가치는 쉽게 발견되지만, 비합리적이며, 감성적인 ‘집단적 쏠림현상’ 속에서, 개인의 존재가치를 찾기란, 해변의 모래 속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렵다.

그래서 소위 ‘대깨문’이라는 집단의 탄생은 불문곡직 이성을 닫아버리고, 감성과 쏠림현상만을 쫓아 다니는, 거친 인간들의 동물에 가까운 야성적 본능이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사려 된다.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반복되는 정보의 유입은 곧 바로 인간의 인식과정 자체를 쉽게 세뇌시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대깨문’의 일원들이 종교계에도 많이 진출해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고등종교’야말로 이성과 합리성이 바탕 되지 않으면, 종교로서의 존립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종교계에서 ‘대깨문’들이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분별력을 상실한 종교단체, 특히 기독교 대형교회들이 진정 종교단체인지, 아니면 교세확장을 위한 사업단체인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한 기독교적 ‘기율’과 ‘신앙의 목표’가 있을진대, 교세가 확장되고, 그 속의 양떼들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온전하게 보호받으며 편하게 살수만 있다면, 목회자의 사회공동체에 대한 사명은 다한 것인가!

사회공동체의 체제가 변질되고, ‘국민’이 ‘인민’으로 바뀌어도 괜찮다는 건가? 뭔가 文정권의 독재가 마음에 걸리지만, 섣불리 나섰다가 권력으로부터 ‘정’을 맡으면, 자신만 손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교회연합성명서 하나 나오지 않는 작금의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프랑스 루이14세 당시, 성직자들이 ‘왕권신수설’을 옹호하자, 백성들은 왕권신수설이 하나님의 의지인줄 알고 쉽게 그렇게 믿었다. 그것도 과학과 산업이 발전하고, 계몽주의철학자들이 사회혁신의 주도권을 잡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사기와 기만으로 가득 찬, 엉터리 교회들과 성직자들이 시키는 대로, 바보처럼, 노예처럼, 그대로 믿었다.

▲ 동네마다 가득한 교회의 십자가 ©블로거 '프리모션'
▲ 동네마다 가득한 교회의 십자가 ©블로거 '프리모션'

지금 한국교회가 그 지경에 빠졌다면 과언일까? 21세기형 니체와 튀르켕이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또 다시 나와야 한다는 것인가? ‘정교분리’는 교황청의 세력 확장으로 열세에 몰린 왕권수호자들이 ‘종교의 간섭’을 줄이고자, 정치와 교회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21세기 현재에는 ‘정교분리’ 본연의 취지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정교분리라는 명제의 뒤편에 고등종교가 숨는 것은 종교 본연의 ‘기율’과 ‘목적’을 저버리는 정말 교활한 짓이다.

이제 ‘청와대주사파’라고 불리지 않고, ‘청와대불사파’로 불리고 있다. 文정권 전에 존재했던 과거정권 같았으면, 벌써 10번도 더 몰락했을 정도로, 안과 밖의 정책실정과 부정부패로 이어지는 기만과 사기술이 범람했음에도 불구하고, 文정권의 권력은 더 크게 확대되었으니, ‘불사파’라고 불리는 것도 이해는 된다.

또 한편으로는, 마치 ‘조폭영화’에 나오는 ‘양아치깡패집단’들과 유사한 이름으로 ‘불사파’라고 불리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이들로 인한 대한민국 파괴행위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대해 지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민주주의는 좌와 우의 소수엘리트들 간 상호 전쟁이 불가피하며, 이들 소수의 엘리트들은 연대와 세력을 먹고사는 ‘선동가’들이기도 하다. 좌파 文정권은 권력, 세력, 연대, 친위대로서의 ‘아방가르드집단’ 등, 모든 것을 다 가졌다. 반면에 반대편 보수우파들은 정말 그 어떤 세력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겁에 질렸는지, 아니면 개인적 실리만을 추구하는지, 제1야당인 국민의 힘은 文정권이 대한민국을 나날이 파괴해 가도, 여전히 듣기 좋은 중도, 실용, 협치, 원내투쟁, 대화와 타협 등만을 강조하고 있다. 때로는 ‘고성’을 지르기도 하는데, 이는 마치 합창대회에 나간 ‘합창단원의 일치된 소리’ 같기도 하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마지막 조직과 세력은 불교와 기독교 종교단체와 연합된 시민단체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체제가 바뀌고, ‘국민’이 ‘인민’으로 될 때는 이미 너무 늦다. 또 그때에는 그렇게 맹신했던 ‘정교분리’라는 사회적 가치도 당연히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이다.

‘대한민국의 자살’을 유도하는 간악한 무리들에 대한 ‘호국불교’와 ‘호국기독교’ 연합단체들이 신속하게 나서줄 것을 학수고대한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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