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남공작 70년사] 공작원 황태성 검거과정

쌍용양회 김성곤·조귀분 여사 통해 박정희·김종필 대면 작전
서신 전달 가능 여부 다각도 검토한 뒤 '직접 전달' 계획 바꿔
임미정 통해 황태성 편지받은 조귀분 여사 중앙정보부에 신고

1950년 6월 28일 북한의 침략으로 인민군에게 서울이 점령당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인민군 환영' 현수막을 단 전차를 타고 서울시내를 달리는 모습.
1950년 6월 28일 북한의 침략으로 인민군에게 서울이 점령당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인민군 환영' 현수막을 단 전차를 타고 서울시내를 달리는 모습.

서울에 침투한 황태성은 먼저 김민하를 통해 임미정과 그의 남편 권상능을 김민하의 집에서 만나 북한에 살고 있는 임미정의 모 황경임의 소식 등 안부를 전해주고 자신의 남파 공작임무를 설명하였다. 또한 김민하를 시켜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A-3방송 즉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령을 숫자전문 또는 모스부로로 받는데 필요한 단파라디오 1대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남파 당시 공작금으로 가지고 온 미화(美貨)를 권상능에게 주어 남대문시장 암달러상을 통해 한화로 교환하도록 한 다음 권상능에게 일부를 공작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나중에 사용하려고 가명으로 은행에 입금하는 일도 하였다. 아울러 성북구 돈암동에 전셋집을 얻고 가구를 들이는 등 향후 활동할 때 사용할 잠복 아지트도 준비하였다.

이렇게 공작활동을 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고 공작전술 토의시 쿠데타 세력과 가까웠던 쌍용양회 사장 김성곤(그는 황태성과 함께 대구인민항쟁에 앞장섰다) 또는 박정희 장군의 형인 박상희의 처(조귀분 여사)를 통해 박정희 장군 또는 김종필을 만날 계획이었다. 그래서 먼저 이들 두 사람의 소재를 파악하는 동시에 접촉 여건을 확인하는 작업부터 진행했다.

그 결과 김성곤보다는 조귀분 여사의 소재를 먼저 파악하게 되었는데, 그가 고향인 경북 선산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을 직접 만나기 위해 임미정으로 하여금 서울 혜화동 일대에서 중앙정보부장의 집을 찾도록 하였으나 찾지 못한 바 있다.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이 원래의 공작계획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하였다.

원래 황태성은 북한에서 공작지도부 간부들과 공작계획을 수립할 때 김성곤 또는 박정희 장군 형수(조귀분 여사)의 소재를 파악한 다음 황태성이 그를 직접 만나 박정희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해줄 수 있는지, 편지를 전달해주겠다면 어떻게 비밀리에 안전하게 전달할지 여부 등을 여러 각도에서 확인한 다음 정중하게 편지전달을 부탁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황태성은 서울 현지에 침투한 뒤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무엇이 부담스러워 그랬는지 조귀분 여사의 소재를 확인한 다음 공작계획대로 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조귀분 여사를 찾아가 편지전달을 부탁하지 않고 인편을 통해 편지를 전달하는 간접적인 방식을 택했다. 바로 조카인 임미정 부부에게 편지전달 임무를 맡긴 것이다.

◇임미정, 경북서 소문난 사회주의 집안 외동딸

황태성이 임미정 부부에게 편지전달 임무를 맡긴 데는 임미정의 과거경력을 미루어볼 때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1932년 임종업과 황태성의 누이동생 황경임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난 임미정은 김천의 남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김천여중을 다니다 대구로 가 외삼촌 황태성의 집에 머물며 경북여중을 다녔다.

부친 임종업은 황태성, 박상희와 함께 경북지역의 ‘사회주의자 3인방’으로 알려진 인물이며,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펼쳐 수차례 구속되는 등 치열한 삶을 살았다. 임종업은 배재고보 시절 황태성의 자취방을 드나들다 그때 진명고녀 학생이었던 황태성의 여동생 황경임을 만나 1928년 결혼하였다.

1946년 인민항쟁에 연루된 황태성이 수배령을 피해 북한으로 가고, 이어 1947년에는 부친 임종업과 모친 황경임이 모두 체포되어 각 5년,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5살 임미정이 홀로 부모의 옥바라지를 맡아 해야 했다. 이듬해인 1948년 7월 황경임은 재심으로 석방되었지만, 곧 북한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참석차 북한으로 올라갔다.

황태성의 외조카로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뒤 남한에서 자수연구가로 활동한 임미정의 영정.
황태성의 외조카로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뒤 남한에서 자수연구가로 활동한 임미정의 영정.

임미정도 1948년 9월 한국 단독정부 반대운동으로 경북여중에서 퇴학당한 뒤 남로당 경북도당의 주선으로 북한으로 갔다. 거기에서 산업성 지방산업관리국장인 외삼촌 황태성과 북로당 간부학교를 다니고 있던 어머니 황경임과 재회했다. 그 뒤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에 편입해 학기를 마친 임미정은 1950년 4월 생물학부에 지원했는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임미정은 학업을 중단하고 6월 27일 ‘김일성종합대학 해방지구 정치공작대’로 선발되어 서울로 내려왔다. 임미정은 서울시청 입구 계단에서 권총을 차고 대원들을 지휘하는 어머니 황경임을 만나기도 했다. 그것이 모녀 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황경임은 1994년 89살로 북한에서 별세했다.

정치공작대원으로 활동하던 임미정은 1950년 9월 낙동강 전투에서 낙오되어 김천의 친척집으로 피신했다. 이때 친구로부터 1950년 7월 아버지 임종업이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사실을 전해들었다. 그러다가 1951년 9월 상주에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재심을 통해 1954년 석방되었다.

그 후 임미정은 자수연구가로 활동하다 2021년 2월 10일 사망(89세)했다. 임미정의 남편 권상능은 대구 출신으로 경북대 사대 부속 중학을 다녔고, 피난지 부산에서 홍익대 사학과에서 한국 근대사를 공부했으며 1세대 화랑인 조선화랑 대표이다.

◇공작원칙 어긴 황태성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황태성은 북한에 있을 때 외조카 임미정이 김민하의 친구이자 처남인 권상능과 혼인(1956년 11월 )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주고 있던 김민하의 도움으로 질녀(여조카)인 임미정 부부를 만나 그들에게 편지전달 임무를 맡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임미정이 북한에서 파견된 정치공작대 대원이었기 때문에 황태성이 임미정 부부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황태성은 임미정 부부에게 편지(황태성이 박정희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면서 ‘이 편지를 조귀분 여사에게 가져다 주면서 내(황태성)가 박정희 장군에세 보내는 편지라는 것을 설명하고 박정희 장군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하더라’라는 취지로 얘기하라고 했다. 조귀분 여사가 여조카 부부의 중매를 했기 때문에 양측 간에는 오래전부터 친분관계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엄연히 극도의 보안을 요하는 공작원칙 위반이었다.

결정적으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여조카 부부가 황태성의 편지를 들고 10월 9일 조귀분 여사를 찾아가 황태성이 시킨 대로 자초지정을 설명한 후 편지를 박정희 장군에게 전달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조귀분 여사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황태성을 중앙정보부에 신고한 조귀분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조귀분 여사를 찾아갔던 임미정 부부는 다음날 선산에서 서울로 돌아와 황태성에게 다음과 같은 만족스럽지 못한 내용의 보고를 했다.

‘조여사에게 정부 고위층과의 접촉을 알선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완강하게 거부하였음. 휴대한 편지는 조여사가 개봉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소각했음. 조여사가 주소를 묻기에 적어놓고 왔음. 조여사 댁에서는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약 30분 앉았다가 돌아섰고 대구에서 1박 하고 서울로 올라왔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임미정 부부를 돌려보낸 조귀분 여사는 서울로 올라가 황태성이 북한에서 박정희 장군을 만나러 내려왔다는 사실을 중앙정보부에 신고했다. 조귀분 여사의 신고를 받은 중앙정보부에서는 곧바로 황태성에 대한 본적지 조사에 착수했다. 최초 황태성의 본적이 경북 김천이라는 사실밖에 몰랐기 때문에 김천시에 가서 황태성의 호적을 확인한 결과 그의 원적지가 경북 상주군 청리면 원장리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따라 수사당국에서는 수사관을 다시 경북 상주에 보내 원적을 확인해보니 김민하, 권상능 등이 황태성의 친인척이라는 사실과 함께 특히 이들 가족 중에 월북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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